[데스크 시각]금고 속 1억 원과 SP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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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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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10만 원씩 내놓아 1억 원을 만들었다고 하자. 이 뭉칫돈을 만드는 데 한 자리씩 차지한 사람은 당연히 1000명이다. 급한 일이 생기면 각자 맡긴 금액만 내주기로 하고 전액을 튼튼한 금고에 넣어둔다. 그 대신 1년 동안은 참여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손대지 못한다는 조건을 걸어둔다. 그럼 1년 동안 이 목돈의 가치는 얼마나 달라질까.

금고에 넣어두었으니 1억 원은 1년 동안 대상이 무엇이든 투자할 방법이 없다. 담보로 맡겨두고 돈을 빌릴 수 있겠지만 1000명이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방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이 1억 원의 가치는 점차 줄어든다. 금고 안은 온도와 습도, 오염과 같은 외부 변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겠지만 물가상승의 영향까지 제거할 수는 없을 터이다.

만약 10개월 뒤 해외로 이주하게 된 한 참여자가 자기 돈을 되찾으려면? 대타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대타로부터 10만 원을 넘겨받고 자신의 지분을 건네주는 식이다. 하지만 누가 10만 원을 고스란히 내고 이 지분을 사려 하겠는가. 9만7000원이나 9만6000원이라면 몰라도 10만 원을 덥석 건네는 대타를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법하다.

그런데 요즘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금고 속 1억 원과 마찬가지인 주식을 지분값의 2배 가깝게 사고파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잇따라 증시에 올라오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스팩)의 주가 움직임이 그렇다는 뜻이다. 미래에셋스팩1호는 상장 이후 4일 연속 상한가 행진을 이어가는 초강세를 보였다. 현대증권스팩1호 역시 19일 상장 첫날 상한가로 치솟았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대우증권스팩의 주가가 평탄하게 움직이는 점을 감안할 때 미래와 현대 스팩의 이상(異常)질주는 코스닥시장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틀을 찾기 힘들다.

국내 스팩의 유일한 목적은 외부 기업과 합병하는 것이다. 합병 대상 기업을 찾기 전까지 스팩 자체의 가치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앞서 예를 든 금고 속 1억 원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혹시 미래와 현대 스팩이 유망한 합병 대상 기업을 일찌감치 확보해 감춰두었다면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래 스팩이 주가 급등의 배경을 묻는 조회공시 요구에 이런 식의 그럴듯한 대답을 제시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이유 없는 상승, 의심은 하지만 배척하지는 말라’는 증시 격언이 있다. 주가는 매우 많은 변수가 제각각의 비중으로 작용해 오르내린다. 따라서 투자자가 주가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작정 외면하지 말고 적응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스팩은 검토해야 할 변수가 많지 않다. 투명성을 기준으로 하면 그 어느 종목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유 없이 상승하면 당연히 의심해야 할 종목인 것이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스닥시장의 스팩 이상 급등을 두고 “시장이 학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를 이유가 없는 종목에 투자자들이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 시행착오 끝에 깨쳐야 한다는 얘기로 들렸다. 수업료가 너무 비싸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진 경제부 차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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