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장수 리스크, 통일 리스크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9일 03시 00분


수년 전부터 한국 증시에는 일상생활에 쓰지 않는 두 단어가 등장했다. ‘장수 리스크’와 ‘통일 리스크’다. 절대 선(善)일 것 같은 단어에 리스크가 결합된 건 한국인의 삶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주는 폭발적인 힘이 두 단어에 잠재돼 있기 때문이다.

장수 리스크는 벌써 깊숙이 들어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노인들은 구멍 뚫린 사회 안전망 속에서 장수시대가 주는 부담을 각자 또는 가족의 힘으로 버텨내고 있다.

물론 건강하고 재정적으로 튼실한 노인들은 이전 세대가 상상도 하지 못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준비 없이 장수시대를 맞은 노인이 더 많다. 부모 봉양과 자식 교육에 떠밀려 정작 자신에 대한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부모보다 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장수시대는 그들에게 ‘축복의 얼굴을 한 재앙’일 수 있다. 노인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지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우리 모두 그들의 비명을 애써 모른 체하고 있을 뿐이다.

천안함 사태를 보며 고령화사회의 그늘을 몰랐던 우리가 변수가 훨씬 많은 통일 리스크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짓이라면 화폐개혁 실패를 비롯한 내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밖에서 위기를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만큼 북한 체제가 절박하고 취약한 상태라는 말이기도 하다. 위기에 내놓은 꼼수가 결국 몰락을 재촉한 역사적 사례는 많다.

글로벌 신용평가 회사들은 한국을 평가할 때 이미 10년 전부터 북한의 도발을 큰 변수로 여기지 않고 있다. 국력격차를 볼 때 북한의 본격적인 도발은 수뇌부의 몰락을 촉발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통일 리스크로 본다. 북한이 동독처럼 갑자기 무너졌을 때 남한이 통일을 감당할 정치 외교적 역량과 경제력이 있냐는 점이다.

올해 통일 20주년을 맞는 독일의 통일비용을 보면 이들의 분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독일은 통일 후 매년 100조∼112조 원에 이르는 통일비용을 쏟아 부어 15년간 약 1750조 원의 돈이 동독으로 흘러들어 갔다. 사회보장비용까지 감안하면 2360조 원에 이른다. 올해 한국정부 예산은 293조 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돈 퍼붓기에도 동독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실제 실업률이 30%에 이를 정도로 피폐하다는 점이다. 이런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은 통일 직후 서독 정치인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동서독 화폐를 무리하게 1 대 1로 교환해 주면서 동독지역의 물가와 임금을 천정부지로 뛰게 만든 게 대표적인 사례. 동독기업의 경쟁력 약화와 동독기업의 전멸을 가져왔다. 단기간의 동독기업 민영화정책과 동독지역 토지 소유권에 대해 반환청구권을 허락하면서 오히려 사유재산권을 혼란에 빠뜨린 점도 치명적인 정책 실패였다.

독일의 경험은 북한이 급변사태에 접어들 때 통일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북한의 경제력을 끌어올리는 세심한 정책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천안함의 불행은 언제고 통일이라는 행운으로 연결될 수 있고, 그 행운이 한민족에게 축복으로 작용할지는 지금 우리가 통일 리스크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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