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정수기와 화장품, 건강식품 등을 취급하는 교원L&C에 방문판매사원으로 입사한 이기자 씨(37·여). 오늘도 그의 손에는 장지갑 크기의 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 하나만 들려 있다. 고객 상담을 해야 하는 그에게 제품설명서나 시제품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제품을 소개하는 동영상과 광고, 관련 뉴스 동영상 파일들이 들어간 PMP를 고객과 함께 감상하는 것이 이 씨의 주된 상담 방법이다.
PMP 상담 방식은 큰 효과를 거뒀다. 방문판매일을 시작한 첫 달에 1200만 원의 매출을 올리며 회사 전체를 통틀어 최우수 파트너로 선정된 것. 입사 3개월 만인 지난해 9월에는 안양 지점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 씨는 “구구히 설명 않고 말하려는 핵심을 담은 동영상을 고객에게 보여주면 시간도 절약될뿐더러 고객의 호응도 좋다”며 “앞으로 실시간 뉴스 등도 고객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넷북도 장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방문판매원=중년 아줌마 등식 깨져
한때 ‘외판원’으로 불리던 방문판매원이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방문판매원의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젊어지고, 똑똑해지고, 정보기술(IT) 기기로 무장한, 세련된 세일즈 직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2만5000여 명의 방문판매원 ‘유피’를 통해 알로에 제품을 판매하는 유니베라는 2007년만 해도 50, 60대 유피 비중이 61%에 이르렀다. 하지만 올해 3월 현재 이 비율은 49%로 떨어졌다. 반면 2007년 38%였던 30, 40대 유피는 현재 50%대로 크게 늘었다. 방문판매업에 늦게 뛰어든 업체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2000년대 초반 화장품 방문판매에 뛰어든 LG생활건강의 ‘오휘컨설턴트’는 출범 당시부터 20, 30대 비율이 절반에 육박했다. ‘방문판매원=중년 아줌마’라는 등식이 깨지고 있는 것.
고학력-남성 비중 높아져
PDA 등 첨단 IT 무장
고객 아이디어 즉시 접수
신제품 개발에
반영시켜
방문판매원의 학력도 올라가고 있다. 전집류 등을 파는 웅진씽크빅의 방문판매원 중 학사 이상의 학력자는 2006년 29%에서 2009년 38%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석사 이상 학력자도 31명에서 101명으로 3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남성 방문판매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웅진코웨이의 남성 방판원 ‘코닥’은 2007년 425명에서 지난해 840명으로 약 2배로 증가했다. 전체 방문판매원 중 남성 비중도 같은 기간 3%대에서 7%대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모레퍼시픽 카운슬러의 경우 새터민은 물론 몽골 출신이 있을 정도로 문화적 배경도 다양해지고 있다. ○ 신제품 개발, 판촉에도 ‘천군만마’
젊고 똑똑해진 방문판매원들은 IT 기술로 날개를 달았다. 두꺼운 다이어리에 기록했던 고객정보와 상담내용은 개인휴대정보기(PDA)로 옮겨졌다. 아모레카운슬러의 PDA에는 고객 이름과 함께 ‘철수네 엄마’, ‘OO슈퍼 사장님’처럼 애칭을 기록하는 기능도 있다.
방문판매원이 판매하려는 상품을 고르면 고객의 화장품 사용주기를 역산해 현 시점에서 재구매 가능성이 높은 고객 명단까지 뽑아준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요즘 고객 관리는 장부나 기억력에 의존하던 과거와는 수준부터 다르다”고 말했다.
알음알음 채용 않고 홈쇼핑TV 통해 공식모집
탄탄하게 다져진 방판조직은 신제품 출시나 신사업 영역을 개척할 때도 든든한 원군 역할을 한다. 교원L&C는 신제품 정수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방판조직의 덕을 톡톡히 봤다. ‘기존 제품의 내부 소재가 스테인리스이니까 신제품에는 스팀 청소 기능을 채택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고객 제안이 방문판매 조직을 통해 접수된 것. 이렇게 수집한 고객 제안은 신제품 개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한국야쿠르트도 올 4월 비타민 제품 ‘브이푸드’를 시판하면서 1만3000여 명에 이르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에게 할인쿠폰 배부와
신제품 설명 등의 임무를 맡겼다. 건강식품 영역에 진출하면서 시장 안착을 위한 측면 지원을 방판조직에 맡긴 셈이다. 한국야쿠르트
관계자는 “1인당 하루 평균 200명의 고객을 만나는 야쿠르트 아줌마의 활약을 기대했다”며 “브이푸드가 출시 한 달 만에 매출
40억 원을 돌파하는 데는 그들의 힘이 큰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방문판매원이 받는 교육도 진화하고 있다. 각 기업은 방문판매원들이 고객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게끔 처세, 재태크, 육아와 교육 등
광범위한 교양교육을 제공한다. 제품 판촉을 위한 교육도 과학적이고 세련돼졌다.
LG생활건강이 ‘오휘 컨설턴트’에게
제공하는 인터넷 동영상 교육 강좌에는 ‘드라마를 통해 알아보는 이런 고객 꼭 있다’라는 강좌가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유형별로 분류해 각각에 맞는 화법과 판촉방식을 알려주는 강좌다. 웅진코웨이의 ‘코디’ 교육과정에는 일반 가정집과 똑같이 재현한
세트에 들어가 고객 집을 방문했을 때의 동선과 대화법 등을 실습하는 내용도 있다.
알음알음 소개로 이뤄지던
방문판매원의 충원 방식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8월 업계 최초로 홈쇼핑으로 방문판매원 모집 방송을 내보내
1000여 명을 증원했다. 웅진코웨이도 3월 홈쇼핑으로 방문판매원 모집 방송을 내보내 방송 첫날에만 문의 전화를 1400통 넘게
받았다. LG생활건강 방판영업지원팀 임효빈 팀장은 “홈쇼핑을 통해 채용했더니 출신 지역별로 고른 분포를 보였다”며 “앞으로도
홈쇼핑 채용방송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 인터넷시대에도 방문판매가 선전하는 이유
한국사회 한번 맺은 관계 - 情 중시 ‘걸어다니는 단골가게’ 효과도 쏠쏠
구몬학습, 빨간펜 등 방문 학습상품과 정수기, 건강식품 등 방문판매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 교원그룹은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창사 이후 처음으로 연매출 1조 원 시대(1조910억 원)를 열었다.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약 10%. 교원그룹 관계자들은 사상 최대 매출을 올린 요인으로 창립 초기부터 다져온 탄탄한 방문판매 조직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화장품 업계에서도 방문판매의 힘은 무섭다. 아모레퍼시픽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화장품 업계의 매출 총액은 약 7조38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방문판매로 올린 매출이 1조7930억 원이었다.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 동안 화장품업계 매출이 39% 성장할 동안 방문판매를 통한 매출은 63%나 늘었다. 국내 1위 화장품 기업인 아모레퍼시픽은 매출액 가운데 38%를 방문판매로 올린다.
홈쇼핑, 인터넷쇼핑몰 등 신(新)유통채널의 공세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방문판매가 선전하는 요인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번 맺은 관계와 정(情)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관계 지향적’인 방문판매 방식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방문판매원은 제품 상담은 물론이고 교육문제부터 재테크, 고부갈등 등 고객 가족의 시시콜콜한 대소사까지도 의논하는 일종의 ‘집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방문판매원이 신뢰할 만한 정보창구 역할을 한다는 설명도 있다. TV와 인터넷으로 상품 정보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에게 깊은 관계를 맺어온 방문판매원들의 설명은 신뢰를 주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방문판매가 불황에 강한 이유는 ‘단골가게 효과’로도 설명한다. 방문판매 방식은 한번 제품을 구입하면 제품과 판매원에 대한 로열티가 높아져 재구입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높다. 방문판매원이 ‘걸어 다니는’ 단골가게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경기가 나빠져 지출을 줄일 때도 방문판매 제품은 ‘마지막 긴축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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