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올라가면 레드와인의 인기는 한풀 꺾인다. 하지만 더위를 반기는 레드와인도 있다.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서 카베르네 프랑 100%로 빚는 시농과 부르게이가 바로 그것. 이들 와인은 가벼운 타닌감과 살랑살랑 약간의 풋내가 나는 딸기향을 무기로 프랑스인의 여름 식탁을 장악한다. 가격은 저렴한데 마시기는 편하다. 그냥 마셔도 좋지만, 얼음을 몇 개 띄우거나 여기에 스파클링 워터나 소다수를 넣으면 탄산감까지 즐길 수 있다.
지금까지 카베르네 프랑은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보조하는 역할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메인 품종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메를로에 자리를 내준 뒤 예전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카베르네 프랑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데 이 역시 더위와 무관하지 않다.
몇 달 전 포므롤을 대표하는 샤토 르 팽의 소유주 자크 티앵퐁은 생테밀리옹에 6ha 넓이의 포도밭을 매입했다. 그의 행보는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비책 가운데 하나로 카베르네 프랑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보여준다. 메를로는 더위에 지나치게 숙성되는 경향이 있어 알코올 도수만을 높여버릴 수 있는 반면 카베르네 프랑은 안정적으로 숙성된다. 이 때문에 보르도 와인업계가 이 품종에 주목하고 있다.
보르도보다 한참 북쪽에 위치한 루아르의 사례에서 벌써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카베르네 프랑은 대체로 서늘한 곳에서 잘 자란다. 보르도, 특히 생테밀리옹에서 카베르네 프랑을 활발하게 재배하는 이유도 이곳이 보르도의 다른 마을보다 서늘하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그동안 사람들은 그나마 샤토 슈발 블랑 덕분에 카베르네 프랑이라는 품종을 기억할 수 있었다. 생테밀리옹의 와인 대부분은 메를로를 주품종으로 삼아 카베르네 프랑이 보조 역할을 하지만 슈발 블랑은 이와는 정반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등한 품질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슈발 블랑에 가려져 있어 그렇지 생테밀리옹의 또 다른 최고 와인인 샤토 오존, 포므롤에서 종종 페트뤼스와 비교될 정도의 높은 품질을 보여주는 샤토 라플뢰르 역시 카베르네 프랑을 메를로와 거의 동등한 비율로 사용해 빚은 와인이다.
카베르네 프랑의 활약은 세계 곳곳에서 서서히 감지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활약이 특히 도드라진다. 안드레아 프랑케티가 만든 테누타 디 트리노로는 이탈리아 컬트 와인의 대표주자인데, ‘토스카나의 슈발 블랑’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카베르네 프랑을 메인으로 보르도의 여타 품종을 조금씩 섞어 만든다. 이 와인의 세컨드 와인 격인 레 쿠폴레는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 이번 주 와인
팔레오, 레 마키올레
레 마키올레는 사시카이아와 오르넬라이아로 유명한 이탈리아 토스카나 볼게리 와인을 언급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와이너리다. ‘슈발 블랑의 지중해 버전’으로도 불리는 팔레오는 2001년 빈티지부터 카베르네 프랑만 100% 사용해 만든다. 레 마키올레의 스크리오, 메소리오도 대단히 흥미를 끄는 와인이다. 전자는 시라, 후자는 메를로만 100% 사용해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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