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대만 출장길에 만난 스티븐 시 씨(32)는 흥미로운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대만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대학원에서 기술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의 현재 직장은 미국의 정보기술(IT)업체도, 대만의 대기업도 아닙니다. 그는 대만 남부 항구도시 가오슝 인근에 있는 수산물 가공 중소기업에서 경리를 맡고 있습니다.
오너 회장의 조카라고 하지만 기업을 물려받을 것도 아닌 그가 다른 회사를 모두 마다하고 냉동 장어구이와 가공 수산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간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규모는 작아도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내 전문 지식을 보태고 싶었다”며 “컴퓨터를 활용한 회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이 회사의 영업 담당 잭슨 차이 씨(32) 역시 회장의 또 다른 조카라고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살면서 갈고닦은 유창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해외 바이어 상대 업무를 맡은 그는 회사의 거래처를 기존의 일본 중심에서 한국과 유럽 등지로 넓히고 있었습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가족들의 헌신 덕분에 이 회사는 냉동 장어구이 수출로만 지난해 300억 원 가까운 매출을 올렸고 해외 거래처가 늘어난 올해는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만 중소기업의 높은 경쟁력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쓸 만한 인재는 모두 대기업만 원한다”고 하소연하는 한국의 중소기업 현실과 전통적인 가족경영을 통해 인재난도 슬기롭게 해결하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만 중소기업의 현실은 또렷이 대비됐습니다.
최근 이런 대만 중소기업에 날개를 달아준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달 29일 중국과 대만 정부가 일종의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하면서 중국 시장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진 겁니다. ECFA 체결로 본격적인 차이완(차이나+타이완)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주권이 중국에 예속될 우려가 있다”는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집권 국민당 정부는 중국 시장을 잡기 위해 ‘어제의 적’과 손을 잡았습니다. 60년 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 온 아픈 기억이 있지만 대만의 미래를 위해 실용적인 접근 방법으로 ‘21세기판 국공합작’을 단행한 거죠.
그러잖아도 높은 경쟁력을 가진 대만 중소기업들이 글로벌 인재로 무장하고 문턱이 낮아진 중국 시장에서 우리나라 기업과 시장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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