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경기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의 한 아파트단지. 입주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단지 안에서 주민을 만나긴 쉽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도 텅 비었다. 경비업체 직원은 “600채가 넘는 대규모 단지지만 현재 살고 있는 건 80가구 정도”라고 귀띔했다. 단지 인근에는 부동산중개업소 10여 곳이 들어서 있을 뿐 문을 연 식당은 별로 없었다. 해가 저문 뒤엔 불빛도 꺼져 단지는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형 건설사가 시공한 이 단지의 계약률은 65% 수준이지만 입주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먼저 입주한 주민들의 속만 타들어간다.
이모 씨(43)는 “3억 원을 대출받아 취득·등록세를 포함해 분양가 5억7000만 원에 구입했는데 이제 금리까지 올라 타격이 크다”며 “지금 팔려면 4억6000만 원에 내놓아야 한다고 해 손해를 각오하고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재산목록 1호’이자 ‘평생의 꿈’인 집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집값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그나마 거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집 한 채가 사실상 전 재산인 상당수 중산층은 자산가치가 줄어드는 사태를 겪으며 속앓이하고 있고, 이사를 가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아 발이 묶이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 ‘재산목록 1호’가 애물단지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들은 집값이 떨어지고 이자 부담이 증가하면서 평생 숙원인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할 지경이다.
경기 남양주시의 한 아파트 계약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40대 초반의 박모 씨는 지난해 127m²형 아파트를 3억8000여만 원을 주고 계약했다. 적금을 깬 돈으로 계약금 4000만 원을 낸 뒤 1∼4차 중도금은 무이자로, 5∼6차 중도금은 대출이자를 내고 빌리기로 했다. 하지만 분양업체 측에서 아무런 통고 없이 대출기관을 신용캐피털 업체로 바꾸는 바람에 6차 중도금은 연 7.2%의 비싼 이자를 물게 생겼다.
아파트 가격 하락으로 가뜩이나 상심이 컸던 입주예정자 중 절반은 고금리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소식에 중도금 납부를 거부하고 나섰다. 박 씨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을 넓혀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했는데 답답한 심정”이라며 “분양권 가격이 떨어지고 계약 포기자도 많아 입주를 해야 할지를 놓고 아내와 갈등이 많다”고 말했다.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앞두고 있지만 현재 사는 집이 팔리지 않는 사람들도 속이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다.
세무사인 50대 유모 씨는 중도금 대출 이자와 잔금 연체료 등으로 한 달에 350만 원을 내고 있다. 지난해 8월 용인시 흥덕지구의 한 아파트를 6억2000만 원에 분양받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서울 도봉구 창동의 아파트가 팔리지 않는 바람에 중도금을 내기 위해 3억3000만 원을 대출받았기 때문. 유 씨는 “분양받자마자 살던 아파트를 급매물로 내놨지만 보러 오는 사람도 없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가슴을 쳤다.
입주 예정자들이 중도금 대출이자와 잔금을 내지 않고 입주를 포기하면서 채권기관에서 아파트를 통째로 공개 매각하려는 사례도 나온다. 인천 영종도 운서지구에 있는 ‘영종금호어울림 1차’는 2007년 분양 당시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 328채 중 200여 채가 입주를 포기해 공매에 들어갈 예정이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가는 집도 늘고 있다. 지난달 법원 경매로 나온 부동산 전체 건수는 7325건으로 5월 6552건에 비해 12% 늘어 2007년 이후 한 달 기준으로는 최대치를 기록했다. 2002년 11월 분양을 시작한 서울 송파구 잠실롯데캐슬골드 주상복합아파트는 최근까지 경매에 나온 것만 11건에 이른다. 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의 강은 팀장은 “실제 거래가 없다 보니 경매 낙찰가가 시세로 자리 잡은 상태”라고 말했다.
○ 관련 업계도 타격, 지방은 패닉
집값 하락과 거래 실종의 먹구름은 부동산 중개업소와 이사업체 등 관련 업계를 덮치고 있다.
무엇보다 부동산 매매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문을 닫는 ‘복덕방’이 늘고 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 따르면 올해 5월 전국 중개업소 가운데 휴·폐업한 업소는 1779곳으로 같은 달 개업한 1565곳보다 많았다. 5년 전부터 서울 길음뉴타운 지역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해온 A 씨는 두 달 전 가게를 접었다. 그는 “매매는 끊어지고 전·월세 위주여서 벌이가 되지 않았다”며 “과거 경기가 안 좋을 때 잠시 문을 닫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아예 폐업하는 업소가 많다”고 전했다.
이사업체, 인테리어업체 등도 일감이 줄어 울상을 짓고 있다. 한 이사업체 관계자는 “이사하는 사람이 줄어든 데다 7, 8월은 비수기여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며 “오피스텔, 원룸 같은 다른 분야에서 일감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회선망 판촉 영업을 하는 강모 씨는 “입주 아파트 단지 주변에 천막을 쳐놓고 영업하고 있지만 미분양이 많아 실적이 형편없다”고 말했다.
지방은 더 심각하다. 미분양 물량이 쌓인 데다 지역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설사들이 줄도산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 미분양 아파트는 2008년 말 13만8671채까지 늘었다가 올해 5월 현재 8만2813채로 줄었지만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지방 건설사들은 미분양으로 수조 원의 돈이 묶이면서 잇달아 무너졌고, 이에 따라 하청업체들도 함께 쓰러졌다. 전문건설협회는 올해 상반기에만 지방에서 61개 전문건설업체가 부도를 맞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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