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무대에서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 수출기업에 엔고(高)는 반가운 현상 중 하나였다.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일본제품 수출가격이 높아지면서 수출시장이 겹치는 부문에서 그만큼 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엔-달러 환율이 지난주 한때 15년 만에 최고치인 84엔대를 기록하면서 ‘초(超)엔고’ 분위기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지만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시장 분위기다. 엔고가 가져올 수출경쟁력 회복의 긍정적인 측면보다 엔화대출 기업의 이자부담 급증과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는 기업들의 경영 악화 등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엔화 대출의 고통 심화
18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기준 엔-달러 환율은 85.47원으로 엔고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시간 원-엔 환율(100엔당)은 1374.3원으로 연중 최저치인 4월 26일 1171.58원보다 200원 넘게 뛰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경제회복 둔화로 엔화가 심리적인 안전 자산으로 꼽혀 세계경기가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 한 초엔고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엔고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싼 금리를 보고 대출을 받았다가 원리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고민에 빠진 중소 중견기업들이다. 한 엔화 대출자는 한국은행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100엔당 840원을 적용받아 대출받았는데 이제 1400원 전후의 엔고로 시달림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소연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2, 3년 전에 원-엔 환율이 높지 않을 때 대출받은 기업들은 시설자금은 이미 써버렸는데 생각만큼 영업이 늘어나지 않아 어려운 처지”라며 “원금이야 상환을 미룰 수 있지만 높은 환율이 적용되는 이자를 갚아나가야 하니 근근이 버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은행 인천 남동공단 담당자는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경 낮은 원-엔 환율로 대출을 받았던 기업들은 엔고 기간이 짧을 줄 알았는데 쉽게 나아지질 않으니 당황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 부품소재 수출기업 ‘일본 수입의 덫’
엔화 대출자와 함께 긴장하고 있는 건 일본에서 부품·소재를 수입해오는 한국의 중소기업이다. 한국 대표 수출품을 구성하는 핵심 부품과 소재는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다. 반도체 후공정업체인 A사는 엔고에 제품 납품 기일을 맞추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안 그래도 상반기에 시장 상황이 좋아지는 바람에 경쟁사들이 부품 구하기에 갑자기 나서면서 부품 수입이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엔고가 겹치면서 수입가격까지 급등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품·소재는 일본을 대신할 공급처가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다. 선박용 모터 제조업체 B사는 일본산 부품 수입이 힘들다 보니 중국산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회사 관계자는 “부품을 일본에서 전량 가져왔는데 엔고와 재고 부족 문제로 중국산을 수입할까 고민 중”이라며 “하지만 중국산은 검증이 안돼 들여오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초엔고가 대일(對日) 적자를 부풀릴 것으로 보고 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워낙 대일 적자가 늘어나는 추세이고 일본에서 수입하는 품목은 대부분 다른 국가에서 대체하기 쉽지 않아 대일 적자가 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업체와 경합이 심한 자동차, 정보기술(IT) 분야 한국 수출기업에게 호재다. 해외시장에서 원화로 표시된 한국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엔화로 표시된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라 해외 소비자 입장에선 비슷한 품질의 제품이라면 한국산 상품을 고를 가능성이 높은 것.
동양종금증권은 최근 발표한 투자전략보고서에서 “최근 엔고 현상은 4분기부터 국내 기업에 이익을 줄 가능성이 높으며 자동차 자동차부품 화학 제지 음식료 업종이 수혜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엔고와 함께 원화가치도 계속 오르고 있어 수출경쟁력에 미치는 환율효과가 상쇄되고 있으며 세계경기 둔화까지 겹쳐 과거 ‘엔고 효과’만큼의 수출 증가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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