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4월 교통부는 자유로웠던 자가용 승용차의 신규 등록을 허가제로 바꿔 연간 2560대만 허용하기로 했다. 교통체증을 완화한다는 게 이유였는데 당시 자동차 등록대수는 10만 대를 약간 넘어 지금의 15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은 교통체증이 일상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처음 발생한 교통체증이 사뭇 심각해보였던 모양이다.
이에 따라 각 시도는 매달 할당된 신규 등록 분량을 선착순으로 받았다. 서울시의 경우 자가용 승용차 신청자들은 접수 전날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이불을 깔고 노숙을 하며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는 촌극을 연출했다. 거기에 부정도 발생했다. 서울시청 앞에서 줄을 섰던 신청자들은 허가대수 이내의 대기표를 받았는데도 자신의 앞에서 접수가 마감되기 일쑤여서 수십 명이 모여 항의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특권층’ 인사들이 줄을 서지 않고 순서를 빼내갔기 때문이다.
1970년 2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동차회사들이 생산 목표량을 초과 달성했지만 영업용보다는 자가용에 충당돼 국민에게 교통난을 겪게 하고 있다”며 자가용 승용차의 신규등록을 아예 일시 중단시키기도 했다. 당시 정부의 승용차에 대한 차별적인 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자동차 관련 세금을 50∼100% 인상하고 할부판매를 폐지했다. 정부는 자동차회사에 매달 용도별 생산대수를 보고하도록 해 사실상 생산을 제한했다. 이 모든 조치들이 교통체증으로 고통을 겪는 국민을 위해서였다.
자동차 생산, 판매, 등록에 강력한 제한이 가해지자 당시 현대자동차와 신진자동차는 판매가 위축돼 피해를 봤다. 자동차산업이 한국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산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박 전 대통령이 일찍 알고 규제보다는 육성책을 내놓고 시내 도로를 열심히 확장했다면 지금의 한국 자동차산업은 일본과 비슷한 위치에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0년 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국내 자동차회사들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1960년대부터 자동차산업 장려정책을 시행했던 일본 자동차는 미국에서 ‘값싸고 연료소비효율이 좋은 차’로 인식되면서 세계 시장에서 우뚝 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겠다던 한국 정부의 자동차산업 억압정책은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 셈이다.
최근 대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13일에는 이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을 만나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상생을 화두로 여러 차례 대기업 오너들을 불러 모았지만 그때뿐이었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대·중소기업의 상생은 중요한 일이다. 대기업들도 말만 앞섰지 실천의지는 부족해 다시 대통령 앞에서 ‘군기’를 잡히는 일을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이런 위로부터의 상생은 규제로 작용해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을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대기업들이 국내 투자 규모를 줄일 수도 있고 해외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에 쓰일 역량의 일부가 소모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대·중소기업 상생이 대통령에 의한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역효과도 낳지 않으려면 좀 더 신중하고 근본적인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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