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자주 찾는 핸드 드립 커피집 대문엔 청동으로 만든 큼지막한 코가 걸려 있다. 아예 이 커피집 상호가 ‘코’다. 주인에게 이렇게 코를 내세운 이유를 물었더니 “커피를 가장 먼저 어디로 맛보지요?”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코로 먼저 맛보는 것을 말하자면 와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커피든 와인이든 재료 원산지, 품종, 다루는 방법 등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다양성의 범위를 놓고 보자면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와인은 포도로 만들지만 포도보다는 다른 여러 과일향을 비롯해 상상하기조차 힘든 생활 속 곳곳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와인의 이런 측면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와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도 많다.
반면 와인을 코로 맛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향에 관한 언급이 구체적일수록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는 “라즈베리, 블랙베리, 크랜베리와 같은 과일을 대체 언제 어디서 맛봤다는 거냐. 정말 이들을 구분할 줄 아느냐”고 말한다. 이 물음에 대답부터 하자면 “구분할 수 있다”이고,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걸 뒷받침할 증거도 있다.
‘르 네 뒤 뱅’, 우리말로는 ‘와인의 코’란 이름의 아로마 키트가 있다. 세계 여러 회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부르고뉴 태생의 장 르누아르가 1981년 선보인 이 키트의 선호도가 가장 높다. 이 키트는 향료가 담긴 작은 병과 각각의 향을 설명해 놓은 안내서로 구성돼 있다. 그 덕분에 향의 개요는 물론이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와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론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더구나 이 키트에는 향료 원료의 모습을 그려놓아 향기를 시각적으로 기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소믈리에가 되려는 이들이 주로 찾는 향 54종을 모은 키트도 있고, 오크통 숙성을 거친 와인향에 특별히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키트도 따로 있다. 향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와인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적인 애호가라면 짧은 시간에 수많은 향을 인위적으로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기존의 익숙한 향에만 의존해 와인을 즐기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럴 때는 레드, 화이트별로 12가지 대표적인 향을 모은 키트가 있으니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아로마 키트 중에는 와인의 결함을 알려주는 냄새만을 모아놓은 것도 있다. 구성 목록을 살펴보니 양파, 콜리플라워, 썩은 계란, 짓무른 사과, 식초, 아교, 말 등 조금만 관심과 수고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주변에서 맡아볼 수 있는 향이라 굳이 키트의 도움이 없어도 될 것 같다.
와인에 언급되는 향이 너무 많다 보니 필자 역시 자연스레 여러 사물의 냄새에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지금까지 눈길조차 두지 않았던 것들에도 관심이 간다. 제 발로 식물원을 찾아가 내내 코를 벌름거리다 돌아온 적도 있다. 와인이 열어준 또 다른 세상이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 이번 주의 와인 도멘 트라페 페르 에 피스, 샹베르탱 1999
결코 잊을 수 없는 와인이다. 며칠 동안 갈지 않은 국화꽃병 물에서 나던,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어릴 적 추억 속의 냄새가 나는데도 맛은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피노 누아르의 진수 그 자체였다. 지금껏 이 와인에 관한 그 누구의 시음 노트에서도 ‘꽃병 물’ 운운하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필자가 적어둔 이 메모를 무를 생각은 전혀 없다. 와인 표현에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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