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터널을 빠져나오기 전에 환율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선진국들은 경기부양과 환율 상승을 막기 위해 ‘돈 찍어내기’ 경쟁에 돌입하고 중국은 위안화 절상 압력에 ‘버티기’로 나오면서 촉발된 환율갈등은 타협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을 포함한 신흥국들도 자국 통화가치의 지나친 상승을 막기 위해 금융시장에 뛰어들면서 환율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요 7개국(G7)은 ‘전쟁 종식’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기로 했지만 미국과 함께 세계경제의 양대 산맥으로 훌쩍 커버린 중국이라는 변수 때문에 환율갈등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원화 가치는 더욱 상승할 수밖에 없어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 ○ 자국 이기주의가 빚어낸 환율전쟁
중국이 6월 19일 ‘유연한 환율제도 개혁’을 발표한 이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환율전쟁은 9월 들어 다시 첨예화돼 최근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선진국은 화폐를 시중에 대량 공급하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일본 중앙은행이 5일 ‘제로금리의 복귀’를 선언하고 찰스 에번스 미국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인플레이션 비공식 목표를 2% 이상으로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물가 급등을 감수하고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의지다. 유럽중앙은행과 영국도 곧 미국과 일본의 전철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선진국들이 유동성을 대거 공급하는 것은 화폐가치를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리를 공격적으로 낮추고 재정을 동원해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어도 별 효과가 없자 경기부양을 위해 수출에 목을 매는 것이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6일 보고서에서 “각국은 수출이 경기를 지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며 “수출확대를 위해 상대적으로 구사하기 쉬운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채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불똥은 신흥국으로 튀고 있다. 선진국의 양적 완화 조치에 따라 불어난 글로벌 유동성이 아시아 및 중남미로 쓰나미처럼 몰려들면서 신흥국 통화가 강세를 띠고 있다. 한국 태국 브라질 인도 등은 외국 자본 유출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힘겹게 환율 방어에 나서고 있다.
○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환율전쟁
관심사는 환율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로 옮겨가고 있다. 시장의 이목은 8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막하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 맞춰 열릴 G7의 비공식 회의로 쏠리고 있다. 과거 플라자합의나 ‘미니 플라자합의’로 불리는 두바이 G7 합의 같은 공동 대처 방안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미국은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무역적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1985년 플라자합의에서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의 평가절상을 유도해 달러화 강세를 약세로 반전시켰다. 또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로 무역적자가 다시 불어나자 2003년 두바이 G7 합의를 통해 달러화 약세를 유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제공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G7 모두 ‘나부터 살고보자’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유일한 경기부양 수단인 수출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G2로 떠오른 중국 변수까지 있다. 중국은 외부 요구에 의한 환율 조정을 거부하고 있다. G7이 합의를 하더라도 중국이 협조하지 않으면 국제공조는 물거품이 된다. 중국은 플라자합의로 일본의 엔화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부동산 거품을 키웠고 결국 버블이 붕괴되면서 장기침체를 불러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 딜레마에 빠진 한국 정부
환율전쟁이 격화되면서 외환당국도 딜레마에 빠졌다. 당국은 그동안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의장국이라는 지위 때문에 외환시장 직접 개입을 자제해오며 환율 급등락의 속도를 조절하는 수준의 미세조정을 해왔다.
그러나 원화가치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지자 5일 주요 외국환은행을 대상으로 특별 외환검사를 실시한다고 밝혀 사실상 개입의 뜻을 내비쳤다. 외환당국의 개입 의사가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7일 연속 하락세를 보였던 원-달러 환율은 5일 8.4원 오른 1130.7원에 마감됐다. 그러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진국의 잇단 양적완화 조치에 환율이 하루 만인 6일 급락세로 돌아섰다. 환율전쟁의 여파가 외환당국의 의지를 무색하게 한 것이다.
좀 더 적극적인 개입 방안도 거론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6일 “외국인이 국내 채권에 투자할 때 이자소득에 대한 면세 혜택을 해지할지 검토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는 외국인의 국내 투자 촉진을 위해 지난해 도입한 인센티브지만 지금처럼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는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율전쟁이 치열해지면서 G20 중심의 글로벌 협의체도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미국이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위안화 절상 문제를 공식 의제로 상정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데 이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브라질과 인도 등도 여기에 동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만약 서울회의에서 환율 문제가 논의될 경우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 국제금융기구 개혁 등 그동안 정부가 공들여온 의제들은 뒷전으로 밀릴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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