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정모 씨(41)는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경기 부천시로 집을 옮겼다. 정 씨가 살던 마포구의 100m²대 아파트 전세금이 2년 전 2억8000만 원에서 최근 3억4000만 원으로 껑충 뛰어버린 탓이다. 정 씨는 “대출금도 있는 마당에 1년 연봉에 가까운 차액을 올려주고 나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하는 수 없이 1억6000만 원짜리 전세를 찾아 서울을 떠났다”고 한숨을 쉬었다.
경기 광명시 철산동의 한 아파트 84m²에서 전세살이를 하는 박모 씨(37)는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다음 달에 전세 재계약을 해야 하지만 집주인이 3000만 원 오른 1억7000만 원의 전세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2년 전 서울을 떠났는데 다시 시흥이나 안양 등 더 먼 곳으로 떠나야 할 형편”이라며 “서울 입성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서울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말했다.
○ 서울 도심→외곽→경기 전세 난민 도미노
정부의 8·29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 수도권의 전세금 상승세가 가파르게 이어지자 정 씨와 박 씨처럼 다락같이 오른 전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싼 전셋집을 찾아 서울 도심에서 외곽으로, 다시 경기도로 밀려나는 ‘전세 도미노’가 벌어지고 있다. 2년의 전세계약이 끝났지만 재계약을 하지 못한 채 ‘전세금 원심력’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 최근에는 전세 재계약을 하는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이 도미노에 희생돼 부동산 업계에서는 이들을 ‘전세 난민’이라고 부를 정도다.
어린 자녀 둘을 키우고 있는 주부 진모 씨(31)는 2년 전 ‘강남’인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76m² 아파트에 1억3000만 원 전세로 들어갔다. 학군과 생활환경 등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강남에 자리 잡을 생각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진 씨는 요즘 서울과 가까운 경기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다니며 새 전셋집을 알아보고 있다. 진 씨는 “지금 전세 사는 곳의 시세는 적어도 2억1000만 원이나 돼 당장 여력이 안 되기 때문에 인생계획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세 도미노 물결이 흘러드는 경기 일부 지역의 중개업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경기 안산시 주공아파트 현대공인 관계자는 “서울이나 경기 의왕, 안양 등을 떠나 전세금이 비교적 싼 이곳으로 오려는 문의가 하루에 수십 건”이라며 “하지만 전세 물건이 나오면 바로 나가기 때문에 수요자들은 시흥 시화, 화성 등 더 먼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안산시의 또 다른 중개업소 관계자는 “원하는 가격에 얻을 수 있는 전셋집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꼭 피란민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혀를 찼다.
‘생활의 불편함을 참더라도 서울에 꼭 남겠다’는 일부 세입자들은 살던 아파트를 포기하고 인근 연립이나 다세대주택으로 향하는 ‘하향 도미노’에 휩쓸리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김모 씨(35)는 “아파트 전세금이 2년 전 1억4000만 원에서 최근 2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며 “출퇴근 때문에 반드시 서울에 살아야 하지만 지금 가진 돈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해 구로구의 전세 1억3000만 원짜리 다세대주택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수요자가 많다 보니 연립주택 전세금도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8월 서울 지역 전세금 상승률은 아파트가 0.2%인 데 반해 연립은 0.4%였으며 9월에도 아파트 0.7%, 연립 0.8%로 아파트보다 연립주택의 상승률이 높은 상황이다.
최근에는 집을 가진 사람들도 전셋집을 찾느라 부산하다. 주로 대출을 받아 집을 샀지만 집값이 떨어져 대출금 갚을 길이 막막해진 이른바 ‘하우스 푸어(House Poor)’들이다. 집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집을 팔아 대출금을 갚고 싶지만 거래 자체가 실종되자 비교적 높은 값에 전세를 주고 대출금을 일부 정리한 뒤 싼 전세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양모 씨(45)는 최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3억 원에 전세로 내주고 서울 은평구의 1억8000만 원짜리 한 주상복합아파트 전세로 옮긴 뒤 남은 돈으로 대출금의 상당 부분을 갚았다. 그는 “집값이 담보가액 이하로 떨어지고 있는 데다 주택 거래마저 안 돼 어쩔 수 없이 전세살이를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 “그래도 집 사면 더 손해” 심리 강해
전세금 상승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7월 중순 이후 서울 전세금은 10주째 상승세를 계속하고 있다. 8월 초까지 주간 상승률은 0.02∼0.03% 수준이었지만 9월 초부터 0.05∼0.11%의 상승률을 보이다가 10월 초에는 0.20%까지 뛰었다.
김규정 부동산114 부장은 “전세금 상승은 이사철에 접어든 탓도 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집값 하락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매매가 사라진 게 가장 큰 원인”이라며 “조금만 더 보태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데도 전세를 찾아나서는 데는 집을 사면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라는 심리가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렇다 보니 2008년 이후 집값은 크게 떨어졌지만 전세금은 크게 오르는 ‘집값-전세금 디커플링(비동조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는 2008년 10월 이후 최근까지 집값이 1.8% 하락했으나 전세금은 24.3% 급등했고 경기 하남시도 같은 기간 집값은 7.4% 떨어졌지만 전세금은 19.6% 뛰어올랐다.
이런 구조적인 이유로 매년 이사철마다 반복되다시피 하는 전세난의 정도가 이례적으로 심하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특히 이번 전세대란은 이사철이 지난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박합수 국민은행 부동산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8년 가을부터 2009년 봄까지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던 시기에 전세로 싸게 들어간 세입자들이 많아 올가을 전세금 체감 인상폭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라며 “하지만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 보금자리 대기 수요 등으로 전세 수요가 매수세에 합류하지 않고 있어 내년 3월까지는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가계부채 700조원 넘는데, 또 부채로 부동산 살리나 ▲2010년 8월30일 동아뉴스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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