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도, 인터넷은 잊어라. 경제성장은 여성이 주도한다(Forget China, India and the Internet. Economic growth is driven by women).”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유명한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4년 전 이렇게 ‘여성 경제 시대’를 예고했다. 최근 한국에서 ‘똑똑한 딸들’의 부상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남학생들이 내신 때문에 남녀공학을 기피할 정도다. 2009년에는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을 처음 앞서기도 했다.》
대졸 여성들의 대기업 입사가 본격화한 시점은 1993년 전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1993년에 “21세기는 여성의 감성이 작용하는 시대”라며 “우수 여성 인력 확보는 기업 생존 차원에서 필수”라고 강조했다. 17년이 지난 현재 국내 대기업에서 여성들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이를 위해 본보는 두 가지 조사를 병행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100대 기업(매출액 기준)의 여성 인력 활용 현황’을 조사하는 한편 고용노동부로부터는 ‘매출 100대 기업 직급별 남녀 고용 현황’ 자료를 입수해 종합 분석했다. ○ 핵심 인재로 뿌리 못내린 여성 인력
100대 기업 중 근로자 500명 이상인 95개 기업의 고용 현황(2009년 12월 기준)을 분석한 결과 전체 근로자 76만3751명 가운데 여성은 17만4830명으로 22.9%였다. 이 중 여성 관리자는 5190명으로 전체 관리자 7만3352명의 7.1%에 그쳤다. 여성 임원 역시 6189명 중 69명으로 1.1%였다.
남성은 전체 근로자 중 ‘과장 이상∼임원 미만’이 34.5%나 되지만, 여성은 이 비중이 8.7%에 불과하고 대부분 대리급 이하 사원들이다. 여성들은 ‘임원 후보군’인 중간관리자급에서 취약한 구조다. 남성은 정상적인 사다리꼴인 반면 여성은 아래쪽에 집중돼 있고 윗부분은 뾰족한 ‘압정 구조’다.
기업별로는 하이닉스반도체, 삼성카드, 롯데쇼핑 등이 여성 관리자 비율이 높았다. 관리자란 결재권과 업무지휘권, 인사평가권 등이 있는 팀장급을 뜻한다.
여성 직원의 비율이 49%인 하이닉스반도체는 여성 관리자 비율도 34.7%였다. 하이닉스반도체 인사부는 “업종의 특성상 제조 공장에 여성들이 많은데 현장 반장 363명이 관리자로 분류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363명 중 대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사내 승진을 거친 관리자는 단 1명. 20년 이상 근무했던 이 관리자마저 최근 퇴직했다.
삼성카드도 여성 비율이 과반인 회사로, 여성 관리자 비율이 27.5%나 됐다. 전체 관리자 280명 중 77명이 여성이다. 하지만 본사 여성 팀장은 3명에 그쳤다. 삼성카드 측은 “고객 상담을 위한 콜센터 인력 1000여 명을 두고 있는데 여성 상담 팀장이 70여 명”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관리자 비율이 26.6%인 롯데쇼핑도 비슷했다. 전체 관리자 2361명 중 여성이 628명이지만 대부분 판매전문직이다. 롯데백화점 인사부는 “고객이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판매전문직을 육성해 백화점 매장을 관리하는 ‘파트리더’를 200명 이상 두고 있다”며 “대졸 신입사원 중에는 1년차 직원들이 파트리더를 맡는다”고 전했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파트리더를 제외한 대졸 공채 출신의 관리자가 250여 명인데 이 중 여성은 2명뿐이었다.
이 기업들은 그나마 여성 인력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매출 상위 100대 기업 가운데 임원은 물론이고 여성 관리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기업도 22곳이나 됐다. ○ 중공업 소극적, 금융보험업 활발해
국내 10대 대기업(금융보험업 제외) 중에서는 삼성전자가 여성 인력 활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여성 근로자가 32.7%인 삼성전자는 ‘과장 이상∼임원 미만’의 중간관리자급 2만8311명 중 여성이 7.1%(2015명)였다. 여성 임원도 8명으로 가장 많았다.
10대 기업 중 여성 비율이 가장 낮은 기업은 기아자동차로 전체 근로자 3만2744명 중 여성이 2.5%에 그쳤다. ‘과장 이상∼임원 미만’의 여성 비율이 0.4%, 여성 임원은 한 명도 없었다.
업종별로는 중공업에서 여성 인력 활용이 부진했다. 중공업은 업종 특성상 여성 근로자 비율이 전체의 4.3%에 그칠 만큼 낮았다. 100대 기업에 속한 22개 중공업 기업 중 12개 기업은 여성 관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중 눈에 띄는 기업은 포스코. 중공업 업종 전체에서 여성 관리자가 101명인데, 그중 포스코 소속이 67명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철강업체이기 때문에 회사에 지원하는 여성 인력 자체가 적지만 일단 입사하면 차별 없는 승진 기회를 주고 있다”며 “사내에 보육시설을 두고 육아휴직제도를 충실히 시행하는 등 가정친화적 정책도 한몫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 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업종은 금융보험업과 도·소매업이었다. 도·소매업은 전체 근로자 중 여성이 54.4%로 남성보다 많고, 여성 관리자 비율도 17.35%로 전체 업종에서 가장 높았다. 금융보험업은 여성 근로자 비율이 46.7%, 여성 관리자 비율이 11.8%로 그 뒤를 이었다.
여성 임원 비율은 금융보험업이 3.6%로, 도·소매업(2.4%)보다 높았다. 100대 기업 중 여성 임원 비율이 가장 높은 ING생명보험은 여성 임원이 전체 36명 중 8명으로 22.2%나 됐다. 한국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도 각각 13.3%, 11.9%의 비율을 보였다. ING생명보험 측은 “외국계 기업 특성상 자기계발이나 가정을 위한 시간 할애가 가능해 여성 관리자와 임원이 많다”고 설명했다. “임원 8명 중 4명은 내부 승진자, 4명은 외부 채용자”라고 덧붙였다.
○ 30대 여성의 경력 단절 뚜렷해
대기업들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졸 여직원을 선발한 것은 당시 정부가 남녀고용평등 정책을 강화했기 때문. 1994년 삼성에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 4500명 가운데 여성은 700여 명이나 됐다. 1990년대 초중반 삼성은 대졸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여성 공채’까지 실시하기도 했고, 다른 대기업들도 매년 100∼200명씩 대졸 여직원을 뽑았다.
이들은 올해 기준으로 16, 17년차인 만큼 현재 과장, 차장 등 여성 관리자급 층이 두꺼워야 한다. 하지만 상당수가 중도에 회사를 그만뒀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력 단절이 30대부터 두드러지는 점을 주목한다. 출산, 육아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국내 여성의 고용률은 결혼 적령기인 29세 이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다 30대에 최저점으로 하락한다”며 “출산, 육아기 여성의 경력 단절이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여성 인력의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최근 5년 동안 대기업에서 ‘여성 상사’ 수가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본보는 대한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매출 100대 기업 중 조사에 응한 52개 기업의 2005년과 2010년의 직급별 남녀 근로자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전체 여성 근로자는 2005년 4만5751명에서 2010년 6만7460명으로 47.5% 증가해 남성 근로자 증가폭 20.8%를 앞섰다.
주목할 부분은 중간 관리자급에서 여성의 부상이다. 여성과장의 수는 2005년 2046명에서 2010년 4244명으로 107.4%나 늘었다. 같은 기간 남성과장은 2만6453명에서 3만178명으로 14.1% 늘었다. 차장직급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증가율이 각각 91.9%, 26.0%로 집계됐다. 중간 관리자급에서 여성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제 기업에서는 여성상사와 일하는 남성 부하직원의 모습이 익숙한 풍경이 됐다.
부장 직급도 남성이 58.9%, 여성이 70.5% 늘었다. 여성 임원도 4명에서 30명으로 늘었다. 그렇지만 3000명에 육박하는 남성 임원에 비해서는 아직 미미했다.
조용수 LG경제연구원 미래연구실장은 “지식과 창의성을 가진 인력, 커뮤니케이션과 공감에 뛰어난 인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기업에서 여성 수요가 늘고 있다”며 “성(性) 다양성이 확대되면 기업의 성과가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5년 사이 여성 임원을 5명 늘렸는데, 대부분 외부에서 영입한 마케팅 전문가들이다. 기업분석업체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100대 기업 여성 임원 50여 명 가운데 45.1%가 외부 영입 케이스다.
육아에 따른 휴직 등 ‘자체 비용’이 발생하는 내부 전문가를 양성하기보다는 필요할 때 변호사, 의사, 박사 학위자 등의 전문가를 단기적으로 투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 마케팅 전문가는 “최근 소비자와의 공감이 강조되면서 기업에서 여성 마케팅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는데, 이들이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1, 2년 만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화제성 영입보다는 여성 전문가를 육성하는 기업문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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