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 어느 모임에서건 건배사는 있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창의적인’ 건배사가 발달한 나라는 드물다. 얼마 전에는 모임의 성격별로 다양한 건배사 콘텐츠를 제공하는 스마트폰용 ‘건배사 애플리케이션’이 나와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최근 열린 서울 주요 20개국(G20) 비즈니스 서밋에서 나왔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건배사가 인상적이었다. 국제행사 등 점잖은 자리에서 건배사는 ‘○○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건배합시다’ 식의 평이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인 중 유일하게 컨비너(회의 주재자)로 참여해 녹색성장 분과 신재생에너지 워킹그룹을 주도한 그는 11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연설이 끝난 뒤 한국식 건배사를 제의해 화제가 됐다.
최 회장은 “화합을 위해 한국식으로 건배사를 하겠다”며 “제가 ‘글로벌(Global)’이라고 선창하면, ‘하모니(Harmony·화합)’라고 화목한 모습으로 답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참석했던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120명은 폭소를 터뜨리며, 모두가 ‘하모니’라고 화답했다.
글로벌과 하모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국제관계에서는 ‘하모니’보다는 그 반대 개념인 ‘갈등(conflict)’이 더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구글 검색창에 ‘+global +harmony’를 넣었을 때 370만 개의 검색결과가 나온 반면 ‘+global +conflict’를 넣었을 때에는 7배가 넘는 2740만 건이 검색됐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글로벌’과 ‘하모니’라는 두 화두가 ‘위트 있는 건배사’ 차원을 넘어 11일 끝난 비즈니스 서밋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번 비즈니스 서밋의 주제는 ‘지속 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한 기업의 역할’이었다. 참석 CEO들은 기업 경영을 하면서 틈틈이 서밋이 열리기 4개월 전부터 의제를 조율했다.
컨비너 역할을 맡았던 조지프 선더스 비자 회장은 최종 순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서밋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른 임원을 대신 참석시켰지만, 마지막까지 화상회의를 거듭하며 의제를 조율하는 열성을 보였다. 최태원 회장은 1000쪽이 넘는 영문 자료를 소화했고, 참석 기업들의 부사장들을 한국에 초청해 토론하기도 했다.
개발도상국 CEO들이 대거 참석한 것도 이번 비즈니스 서밋이 다른 경제포럼과 달랐던 점이다. 일반인들에겐 거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오만, 앙골라, 인도네시아 등의 기업인들이 참석해 균형 있는 시각을 제공했다. 인포시스의 크리스 고팔라크리슈난 회장은 청년실업에 대해선 글로벌 리소스 센터를 건립하는 등 G20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녹색성장 분야에서의 장기 에너지정책, 재원 조달, 나라별 규제 조화 등 비즈니스 서밋 워킹그룹 권고의 상당 부분이 G20 정상합의문에 채택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권고사항 중 에너지장관 회의 정례화도 주목되는 내용이다. 비즈니스 서밋은 권고사항을 주요국 정부에 공식 전달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이다. 각국 정부도 기업인들의 ‘글로벌’이라는 선창에 ‘하모니’로 응답했으면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