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업체 대표 강모 씨는 대형건설사들의 실적 발표 기사를 보면 가슴이 쓰리다. 대형건설사들의 이익이 모두 ‘중소건설사들을 쥐어짜서 번 돈’이라는 생각에서다. 강 대표는 지난달에도 공사 예정가격이 22억 원인 한 아파트 단지 조경공사 입찰에 16억 원을 적어냈지만 두 번 유찰된 끝에 결국 10억 원을 쓴 다른 업체가 공사를 따냈다. 그는 “해봐야 밑지는 장사라서 아예 입찰을 포기하는 때가 많다”며 “하도급 대금을 너무 깎아 먹는 대기업 횡포가 여전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강 대표의 울분은 정부가 올해 초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강조하는 가운데 벌어진 중소건설업계의 현주소다. 올해 3월 대형건설사 대표들과 중소 협력업체 대표들이 ‘상생협력 및 공정거래 협약식’을 체결했고 8월에는 정부가 ‘건설분야 기업환경 개선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상생’은 구두선에 불과하다. 동아일보가 자본금 5억 원 미만인 3만8000여 개 중소건설사가 가입한 대한전문건설협회와 함께 회원사 527곳을 설문조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 “다른 업계보다 더 불공정 심하다”
설문 결과 중소건설사 10개 중 7개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설업계의 관행에는 변화가 없다고 답했다. ‘대책 발표 이후 건설업계 불공정거래 행위가 얼마나 줄었느냐’는 질문에 69.5%가 ‘그대로’라고 답했다. 이어 △‘약간 줄었다’ 24.1% △‘많이 줄었다’ 3.0% △‘조금 늘었다’ 2.4% △‘많이 늘었다’ 1.0%의 순이었다. 다른 업계와 비교할 때 건설업계의 불공정거래 수준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약간 심하다’ 38.2% △‘비슷하다’ 35.1% △‘훨씬 심하다’ 17.8% 순으로 부정적인 응답이 많았다.
또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점으로는 △‘경쟁 입찰 시 고의로 2, 3차례 유찰시키거나 특정 업체와 협상해 부당하게 낮은 금액으로 결정하기’ 45.1% △‘현금 이외의 어음이나 현물로 결제하기’ 21.6% △‘민원처리 및 제반 비용을 모두 하도급 업체에 넘기는 부당한 특약조건’ 12.7% 순으로 응답했다.
특히 중소업체들은 하도급 불공정거래가 뿌리 뽑히지 않는 이유를 ‘오랜 관행’(39.7%)과 ‘대형건설사들의 상생 의지 부족’(33.8%)이라고 답했으며 개선대책으로는 ‘상생 의식 개선’(44.8%)과 ‘처벌 강화’(26.9%) ‘법적 제도 보완’(26.2%)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후려치기’ ‘어음 주기’ ‘떠넘기기’
무엇보다 중소업체들은 민간공사의 ‘가격 후려치기’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대형건설사들이 전자입찰을 통해 공사가격을 접수하지만 원하는 가격이 나오지 않으면 마음대로 재입찰에 붙이기 때문에 결국 점점 낮은 가격을 써낼 수밖에 없다는 것. 특히 중소업체의 55.6%는 ‘대형건설사가 책정한 목표금액 자체가 너무 낮다’는 사실을 후려치기의 근본 배경으로 지목했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은 ‘현저하게 낮은 수준’으로 공사비를 낮추지 못하도록 규정했지만 민간 발주에 대해서는 제재할 수단이 없다. 공공공사는 발주기관이 국토해양부의 ‘저가하도급 적정심사기준’에 따라 공사대금의 적정성을 심사하지만 민간 발주는 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콘크리트업체 사장인 A 씨는 지난달 공사를 발주한 건설사로부터 받은 어음을 들고 사채업자를 찾아가 20%의 어음할인료를 떼고 현금을 확보했다. 그는 직원들 인건비를 줄 돈이 없어 발주처에 사정했으나 2개월 넘게 지나서야 3개월 만기 어음을 받았을 뿐이다. 그는 “발주처가 A등급의 우수업체가 아니어서 은행권에서는 어음을 받아주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채시장에서 현금으로 바꿨다”고 밝혔다. 이처럼 공사대금을 현금으로 주는 대형건설사가 늘지 않았거나 오히려 줄었다는 답변도 75.9%에 이르렀다. 어음으로 주는 경우도 ‘만기 60일 이내’는 32.5%에 그쳤고 어음을 받은 중소업체의 80%는 비싼 할인수수료를 직접 부담하고 있었다.
중소업체에 비용을 떠넘기는 특약을 추가하는 관행도 개선되지 않았다. 본보가 입수한 한 대형건설사의 하도급 계약서는 ‘공사 중 발생한 모든 민원사항은 하도급 업체가 처리한다’ ‘인허가 및 모든 제반비용은 입찰금액에 포함시킨다’ 등의 특약이 달려 있었다. 올해 초 건설산업기본법 시행령이 개정돼 일부 부당한 특약에 대한 금지조항을 만들었지만 현장에서는 아직도 유명무실하다. 또 하도급계약 후 설계변경이나 물가변동으로 공사 금액이 늘어날 경우 ‘대금을 조정받지 못하거나 비용 떠넘기기를 강요받았다’는 답변이 36.7%에 이른다. 원도급자가 발주자로부터 지급받은 선급금을 당초 계약비율대로 받느냐는 질문에도 ‘지급받지 못한다’ 또는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답변이 48.9%에 이르렀다. 일부 대형건설사는 공공공사 도급액이 발주금액의 82% 이하로 하청을 주지 못하게 한 법률을 피하기 위해 이중계약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응답자의 11.1%가 올해 공사에서 이중계약서 작성을 요구받았다는 것.
○ 최종 피해는 소비자에게 돌아와
미장업체 대표 안모 씨는 올해 초 한 건설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했다. 이 회사가 시공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하자가 있다며 소송을 제기해 돈을 물어주게 되자 이를 안 씨 등 협력업체들이 분담하라고 했기 때문. 안 씨는 “공사비를 낮게 받는 만큼 자재를 싼 걸로 쓰거나 인부들에게 작업 단위로 보수를 줘 날림으로 시공할 수밖에 없다”며 “공사비를 적게 주면서 빨리 일을 끝내려다 보니 미장, 설비 등 공정별로 연쇄 부실이 발생한다”고 털어놨다.
결국 마지막에 피해를 보는 것은 소비자다. 김관보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는 “협력업체들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공사비를 받고 일을 하면 어딘가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라며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싼 재료를 사용하거나 비숙련 인부를 쓰게 돼 부실공사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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