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훈련을 받던 때가 생각납니다. 졸업 직전에야 군복무를 마친 탓에 입사 후에도 몇 년 동안 해마다 2박 3일씩 회사 업무를 멈추고 훈련을 받으러 경기도 산골짜기 군부대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낯선 사람들 틈에 둘러싸인 탓에 오히려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았던 때였죠.
혼자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준 건 소설책이었습니다. 처음 고른 책은 군복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간다는 이유로 골랐던 파울루 코엘류의 ‘연금술사’였습니다. 그러자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늘 바지 주머니의 단골손님은 코엘류의 책이었습니다.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코엘류의 소설들은 대부분 구원이나 스스로에 대한 성찰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격장의 총소리나 연병장의 흙먼지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상황이 오히려 이 소설들을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코엘류의 소설들은 최근 또 다른 낯선 모습으로 제게 찾아왔습니다. 새 소설 ‘브리다’ 얘깁니다. 이제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는 저는 군복 바지 주머니 크기와 책 크기의 상관관계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대신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무엇을 담을까 고민하죠. 그때 브리다가 전자책으로 발매됐습니다. 새 소설의 재미는 변함없습니다. 브리다라는 젊은 여인이 삶의 비밀에 갈증을 느끼고 진실을 배워가며 자아를 찾아갑니다. 사격장과 연병장이라는 낯선 환경처럼 액정표시장치(LCD)의 차가운 조명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리도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소설의 힘은 변함없습니다.
코엘류는 이런 소설의 힘이 새로운 기술과 만나면 몇 배로 커진다고 믿는 작가입니다. 이달 초에야 번역된 따끈따끈한 신간인 브리다가 종이책과 동시에 전자책으로 발간된 사실 자체가 저작권 문제를 따지며 좀처럼 전자책 출판을 하지 않는 다른 작가들과 비교됩니다.
그는 심지어 저작권 계약 없이 무단으로 자신의 책을 번역해 인터넷으로 공유하던 독자들에게 이런 ‘무허가 번역본’을 직접 홈페이지에서 내려받게 해주던 작가입니다. 출판사에서는 해적판 유통의 책임자를 찾으려다 그게 저자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엘류의 책 판매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네스협회가 공인한 ‘작품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생존 작가’이고 그의 소설 ‘연금술사’는 6500만 부 넘게 팔리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가운데 한 권이 됐습니다.
작가들에게 해적판을 용인하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독서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인 상황에서 독자와 소설가 사이를 가로막는 좁은 유통경로를 전자책이 넓혀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달라는 겁니다. 독자들은 비록 서점에도 가지 않고 종이책도 들고 다니지 않지만,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세계에서도 이야기의 매력은 충분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