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0대 그룹의 최근 5년간 실적이 지배구조에 따라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경제위기로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에 책임 경영을 펼칠 수 있는 총수의 유무가 기업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지배구조 따라 ‘성적 차’ 확연
26일 공정거래위원회 대규모기업집단 정보공개시스템 자료를 바탕으로 동아일보 산업부가 경제 전문가 10명과 함께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26대 대규모기업집단(그룹) 중 총수가 있는 민간 그룹 19곳은 2004∼2009년 당기순이익이 12.1% 늘었다.
반면 포스코 KT 대우조선해양 등 총수가 없는 민간 그룹 3곳은 이 기간에 순이익이 15.2% 줄었으며, 한국전력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철도공사 등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 4곳은 순이익이 49%나 떨어졌다.
민간 그룹이냐 아니냐, 민간 그룹 중에서도 총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실적이 크게 갈린 셈이다. 공정위 기준에 따라 금호그룹은 총수 있는 민간 그룹으로, 철도공사는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분류했으며, 30대 그룹 중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부영 등 최근 5년간 한 번 이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서 빠진 4개 그룹은 분석에서 제외했다.
종업원 수나 매출액을 비교해 보면 세 그룹 간의 차이는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총수 있는 민간 그룹은 5년간 종업원 수가 26.1% 늘어났으며, 총수 없는 민간 그룹은 17.9%,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은 9.0% 늘어났다. 세 표본 집단 중 이 기간에 매년 종업원 수가 전년보다 늘어난 집단은 총수가 있는 민간 그룹뿐이었다.
또 총수 있는 민간 그룹은 5년간 매출액이 61.5% 늘었지만, 총수 없는 민간 그룹은 49.0%,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은 58.6%가 늘어났다. 여기서도 역시 매년 전년보다 매출액이 늘어난 집단은 총수 있는 민간 그룹밖에 없었다. ○ 총수 없으면 안정성에 매달려
전문가들은 대체로 “표본 수가 작아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배구조 차이가
이런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진단했다. 특히 이 시기에 세계 경제위기라는 외부 변수가 있어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의사결정을 쉽게 내리기 어려운 시기에 대리인인 전문경영인과 오너십이 있는 총수의 행보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2008년 말 세계 경제위기를 앞두고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으면 안
된다. 그래야 나중에 성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사례를 들며 “전문경영인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LG그룹은 실제로 2008∼2009년 직원을 1만7600명 이상 늘렸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은 “총수가 있는 민간 그룹에서는 총수에게 실적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임원들이 성과에 민감해진다”며 “반면 총수가 없는
경우에는 안정성이 중시되고 특히 불경기에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기 시에 과감하고 빠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오너 경영’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착각이라는 지적도 있다. 금호그룹의 경우 오너 경영을
했지만 대우건설·대한통운 등을 인수하며 무리하게 몸집을 불렸다가 자금난에 빠지며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금호그룹은 2004년
당기순이익이 7243억 원에서 2009년에는 3조8000억 원이 넘는 적자로 돌아섰다.
○ 공기업 직원 줄었다가 제자리로
공기업들의 경영 실적이 저조한 데 대해서는 ‘사회적 목적이 있는 공기업을 실적만으로 평가하는 건 잘못’이라는 의견과 ‘공기업
개혁이 불충분하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김기승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기업은 새로운 사업이나 해외 시장 개척 등에 대한 투자
의지가 별로 없다고 본다”며 “사업 확장보다는 재무구조를 튼튼히 하거나 생산성 확장, 조직 혁신 등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이 4개 공기업 직원 수가 4.4% 늘었다가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에는
1.0% 감소했다는 점이다. 분석 기간을 정권별로 나눠 보면 노무현 정부 3년 동안 공기업 직원은 총 6600여 명이 늘어
연평균 2%씩 증가하는 모습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2년 동안 증가한 종업원은 모두 합해 900여 명에 그쳤다.
이
공기업 4곳은 2008년 한 곳도 예외 없이 모두 40여 명에서 400명까지 종업원을 줄였으며, 이는 현 정부가 정권 초 공기업
개혁을 강하게 추진한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전의 경우 2008년 240여 명 줄였다가 지난해 일자리 나누기 사업 등을
추진하며 1100여 명을 늘려 직원 수가 결과적으로 더 늘어났으며, 철도공사도 2008년 260여 명을 줄였다가 지난해 600명을
늘렸다.
▼ 총수 사면효과 얼마나 있었나… 고용은 변화없지만 장기사업 리더십 발휘 ▼
“경제 발전에 공로가 많았던 기업인들에게 국가와 사회에 헌신할 기회를 다시 한번 부여해 침체된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는 계기로 삼자는 명분에서… 기업 사기 및 경제 활력 진작을 위한 계기가 필요하다.”
○ 사면 전후 직원 증가율 큰 변화 없어
2006년 11월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5단체가 기업인에 대한 특별사면·복권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면서 언론에 배포한 자료다. 이때 사면 청원 대상자 명단에 있었던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은 이듬해 2월 사면됐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은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사면·복권 건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동안 재계는 정부에 기업인 사면·복권을 건의할 때마다 그 명분으로 ‘경제 살리기’를 들었다. 총수가 사면·복권이 돼야 그룹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고 이것이 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04∼2009년 총수 일가가 사면됐다고 해도 해당 그룹의 고용 정책이 단기적으로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사면을 받은 주요 기업인은 박용성 전 회장과 2008년 8·15 특사로 사면된 정몽구 회장, 최태원 회장 및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그리고 지난해 12월 단독 사면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이다. 그러나 SK그룹을 제외하고는 이들 그룹 중 총수 일가가 사면된 해나 그 다음 해 기존 추이 및 다른 그룹과 비교해 눈에 띄게 직원 수가 늘어난 그룹은 없었다. SK그룹도 2008년에는 3600여 명을 늘렸지만 2009년 1200여 명을 줄였다.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총수가 사면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해당 그룹이 고용을 늘릴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며 “총수가 기업 경영에 전념할 수 있게 돼 그로 인한 효과가 나타난다 해도 장기적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단기 효과 요구하는 것은 무리”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용은 사면과 직접 연관이 있는 부분이 아니라 기업의 장기 전망과 투자 계획에 따라 이뤄진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상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정몽구 최태원 회장 등이 사면받은 시기가 세계 경제위기 기간과 겹친다”며 “해외 기업들이 대규모로 감원할 때 일자리를 조금이라도 늘린 걸 노력의 결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삼성그룹의 경우 올해 5월 2020년까지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5개 분야 신수종 사업에 23조여 원을 투자하기로 한 것을 지난해 말 이건희 회장의 사면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시각도 있었다.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기 전 운영했던 사장단협의회 체제라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경영 복귀 뒤 첫 공식 사장단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 같은 신사업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삼성 측은 친환경과 헬스케어 신사업 투자를 통해 4만5000명을 추가 고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 분석에 참여한 전문가(가나다순)
김기승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 김종석 홍익대 경영대 교수(경제학 전공) 박승록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손동원 인하대 경영학부 교수 손민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 장석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센터 소장 한진희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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