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결과 브리핑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가협상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김 본부장은 “한국의 일방적인 양보라는 일부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정부는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가협상에서 미국 자동차시장을 보호하려는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철폐 일정 조정 요구는 물론이고 자동차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신설하자는 것도 받아들였다.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우리 시장에 수입되는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철폐 일정 역시 조정했지만 자동차 분야에서만 보면 한미 FTA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많은 부분을 양보했다는 평가다.
○ 관세 철폐 늦어지지만 현지 생산으로 우려 해소
자동차업계 전문가들은 대체로 “관세 철폐는 연기됐어도 잃은 것이 많지는 않다”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FTA를 빨리 발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한국 차량의 미국 수출과 미국 차량의 한국 수출 대수를 고려해 미국 측의 무역불균형 해소 요청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5일 한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1∼10월 누적) 미국으로 수출한 한국차는 41만7041대. 반면 수입된 미국산 차는 7500대에 불과해 단순 계산으로도 55배가 넘는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주력산업팀장은 “미국이 생각하는 무역 불균형이 심각했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한미 FTA는 우리에게 유리한데 눈앞의 작은 손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미국에 수출되는 한국산 승용차에 대한 관세 2.5%는 협정 발효 5년차에 완전 철폐된다. 당초 안은 배기량 3000cc 이하급은 즉시 철폐, 3000cc 초과급은 3년 이내 철폐였다. 관세 철폐 일정이 다소 늦어졌지만 그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한국에서 만들어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은 매년 감소하는 반면 미국 현지생산 물량은 늘고 있기 때문. 현대차가 올해 들어 10월까지 미국시장에서 판매한 45만1454대 중 57%가 현지생산 물량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도요타가 최근 주춤하고 있는데 만약 관세 철폐 효과를 좀 더 빨리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면서도 “현지 생산량이 많아 문제없다”며 미국시장에서의 불확실성이 해소돼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기아자동차는 아쉬운 표정이다. 기아차가 올해 들어 10월까지 미국에서 판매한 30만9147대 중 37%(11만3379대)만이 현지 생산분이다. 기아차는 “‘스포티지’ ‘쏘울’ 등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차량이 혜택을 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자동차부품업계는 한국산 자동차부품에 붙는 미국 관세(1.3∼10.2%)의 즉시 철폐를 환영했다. 부품업계는 이 조치가 대미 수출경쟁력을 높일 것으로 기대했다. 부품업계의 올해 대미 수출액은 40억 달러(4조5520억 원)로 예상된다. 현대·기아차 역시 미국 자동차시장에서 가격인하 요인이 생겼다고 반겼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관세가 철폐되면 싼값에 한국산 부품을 구입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완성차 가격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 세이프가드는 현지생산 확대로 풀어야
이번 협상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특별 세이프가드 조항 신설이다. 세이프가드는 상대방의 경쟁상품으로 자국 산업이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될 때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다. 기존 합의안에서는 발동 기준이 낮은 일반 세이프가드만 있었으나 이번엔 자동차 분야에 한정된 특별 세이프가드가 새로 만들어졌다.
양측은 세이프가드에 대해 관세 인하가 시작된 뒤 10년간 적용이 가능하며 발동기간은 최대 4년, 발동 횟수는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또 세이프가드 실행 후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자유화의무’는 규정하지 않고 2년간 보복을 금지하는 조항도 넣었다.
국내 자동차업계는 세이프가드를 우려하면서 이를 피해가기 위해 미국 현지생산분을 늘려가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서성문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세이프가드 조항은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자동차 대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현대차와 기아차는 앨라배마, 조지아에 공장을 한 곳씩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세이프가드를 발동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실제 세이프가드를 발동하기 위해서는 관세 철폐로 수입량이 갑자기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등 세부 요건이 엄격하다”고 강조했다.
픽업트럭 등 한국산 화물차에 대한 25% 관세를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폐하기로 했던 미국은 협정 발효 후 8년째부터 인하하기 시작해 10년째에는 완전히 철폐한다.
○ 미국차, 싸지고 다양해질 것으로 전망
한국 수입차시장에서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FTA 덕을 보게 됐다. 이번 FTA에 따라 현행 8%인 미국산 승용차 관세는 4%로 인하되고 5년 차부터는 관세가 완전 철폐된다. 자동차 가격이 4500만∼6600만 원인 미국차는 300만∼500만 원의 현행 관세가 150만∼250만 원으로 낮아져 그만큼 가격 인하 여력이 생긴다.
또 자동차 안전기준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도 받아들여져 제작사별로 1년에 2만5000대까지 미국 안전기준을 준수할 경우 한국 안전기준을 준수한 것으로 인정키로 했다. 이는 기존 6500대에서 4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환경기준 규제도 완화됐다. 한국 정부의 환경기준 규제는 ‘L당 17km 이상의 연료소비효율, km당 140g 이하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지만 미국산 자동차는 이 기준의 81%만 지키면 한국 자동차시장에서 판매가 가능해졌다. 다만 환경기준은 기존 FTA 합의안에는 관련 내용이 없어 별도의 합의의사록(Agreed minutes)을 통해 구속력을 담보하기로 했다.
국내에 판매되는 미국차들은 대형차인 데다 디젤에 비해 연비가 낮은 가솔린을 주로 쓰기 때문에 환경규제에서 더 불리했다. 한편 올해 1∼10월 국내 수입차시장에서 GM은 1102대, 포드는 3818대, 크라이슬러는 2580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미국차의 수입차 시장점유율은 8.4%에 머물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