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와 종로구에 걸쳐 있는 ‘청계천 공구상가’는 항상 분주합니다. 구멍가게 같은 공구 판매 점포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데다 각종 공구로 가득 찬 진열대가 인도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 사이로 인파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들까지 뒤엉켜 편하게 걷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근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세계 1위 전동공구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입국 다음 날 오전 만사를 제쳐 두고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바로 독일 보쉬의 전동공구 사업부 슈테판 하퉁 사장입니다.
세계적인 자동차부품·전동공구 회사에서 약 4조5000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그가 청계천 공구상가를 찾은 것은 이곳이 전 세계 휴대용 전동공구 시장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드릴 등 휴대용 전동공구는 유선 제품에서 니켈카드뮴 배터리 제품을 거쳐 리튬이온 배터리를 장착한 것으로 진화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리튬이온 배터리 제품이 보쉬의 국내 휴대용 전동공구 판매량의 4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앞서 가고 있습니다.
정보기술(IT)이나 전자 분야에서 우리가 글로벌 시장의 트렌드세터 역할을 한다는 얘기는 익숙하지만 전동공구도 그렇다는 것은 생소합니다. 게다가 그 이유가 청계천 공구상가 때문이라니 궁금증이 더해집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하퉁 사장은 이날 “상인들을 만나 보니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 엔지니어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기술적으로 진화한) 최신 제품을 선호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상인들과 엔지니어들의 적극성이 청계천이라는 밀집된 구조와 만나 빠르게 유행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쉬에 따르면 지난해 보쉬 전동공구의 매출은 2008년에 비해 약 15%가 줄어들었는데 한국 시장에선 오히려 12%가량 늘었습니다.
하퉁 사장은 이날 “한국은 가장 혁신적인 시장”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국을 치켜올린 것은 보쉬에 리튬이온 배터리를 공급하는 삼성SDI 같은 굴지의 첨단기업부터 책임감 있는 엔지니어와 적극적인 상점주인들의 모습을 직접 봤기 때문입니다. ‘장인정신’의 나라 독일에서 온 글로벌 기업의 CEO는 우리의 경쟁력을 대기업뿐만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풀뿌리 경제주체들에게서 찾은 셈입니다. 세계적인 트렌드를 이끌며 글로벌 기업의 CEO를 반하게 한 청계천 공구상가. 우리 산업계를 뿌리부터 지탱하고 있는 이곳의 진가를 정작 우리만 몰랐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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