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승리하고도 과도한 비용 탓에 ‘경영 후유증’
기업가치 과대평가-무리한 사업확장 욕심이 화근
《 최근 현대건설 매각과 관련해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라는 말이 기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승자의 저주’란 무엇이고 왜 일어나게 되는 것인가요. 》 ‘승자의 저주’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다른 기업을 인수합병(M&A)하고도 과도한 비용을 치르는 바람에 오히려 경영이 위험에 빠지거나 큰 후유증을 겪는 상황을 말합니다.
‘승자의 저주’라는 용어는 1950년대 미국의 정유업계가 석유시추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데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멕시코 만 등에 상당한 양의 석유가 매장돼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자 많은 미국 기업이 경쟁적으로 시추권 경매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전에 매장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석유 매장량의 가치는 경매에서 낙찰을 받은 기업들이 치른 비용에 한참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많은 정유 기업이 경매에서 승리하고도 큰 손해를 보는 일이 일어났고 나중에 이를 ‘승자의 저주’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승자의 저주는 기업 M&A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기업들은 기존의 사업이 이익을 내는 데 한계에 부닥치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때 다른 기업들에 대한 M&A에 나섭니다. 하지만 M&A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재앙으로 바뀌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M&A를 한 기업의 70%가 실패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승자의 저주’는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승자의 저주’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수할 기업의 가치를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판단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비합리성’이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기업의 적정한 가치를 쉽게 판단하고 누구나 알 수 있다면 ‘승자의 저주’는 쉽게 일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기업의 가치를 매기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등 겉으로 드러나는 가치뿐만 아니라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나 인재, 사업의 장래성, 그리고 인수 후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도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소지만 이들을 평가하는 잣대에는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일단 어떤 기업을 인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에는 그 기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어 하는 비합리적인 심리가 작용해 인수 대상 기업 가치를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렵게 합니다.
경영진과 주주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주인-대리인 문제’도 ‘승자의 저주’를 불러오는 원인이 됩니다. 경영진은 기업 가치를 극대화해 주주들에게 이익을 돌려줘야 하는 대리인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 또 개인적인 욕심으로 이를 망각하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현대건설 매각도 ‘승자의 저주’에 대한 우려가 많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이뤄진 입찰에서 현대건설 지분 34.9%를 인수하는 데 현대그룹과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각각 5조5100억 원과 5조1000억 원을 입찰가로 써냈습니다. 시장에서는 현대건설의 매각 적정가격을 4조 원 안팎으로 보고 있는 만큼 두 회사가 인수 경쟁을 벌이면서 지나친 비용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실제로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매각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자 현대그룹의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가 현대건설 채권단이 MOU를 해지하면서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번엔 현대차그룹의 주가가 떨어졌습니다.
정부는 최근 ‘승자의 저주’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대형 M&A 과정에서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들의 재무상태를 점검하고 무리해서 자금을 빌리지는 않았는지 사전에 점검하는 방안이 거론됩니다. 하지만 ‘승자의 저주’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주주들이 경영진의 결정을 견제할 수 있도록 주주권한을 강화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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