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브랜드인 재규어가 럭셔리 세단의 세계에서 주류였던 적은 없었다. 종합적인 성능에서 독일산 ‘종마(種馬)’들에게 밀렸고,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상대적으로 혁신도 부족했다. 그래도 독특한 영국 귀족풍의 디자인과 고전적인 인테리어로 ‘누구나 타는’ 독일 럭셔리 세단에 질린 고객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독일 자동차들의 화려한 변신에 전통만으로 밀어붙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재규어 수석디자이너였던 이언 캘럼에게 재규어의 새로운 전통을 세워줄 것을 당부하며 명성 회복에 나섰다. 그 첫 작품이 2008년 탄생한 ‘XF’이다. 재규어 변신의 2탄이 바로 ‘올 뉴 XJ’다. 재규어의 대들보 같은 차종이자 메르세데스벤츠의 ‘S클래스’, BMW ‘7시리즈’, 아우디 ‘A8’ 등 독일의 막강한 차종과 숙명적인 대결을 펼쳐야 하는 영국의 외로운 신사다. 과연 신형 XJ는 훌쩍 앞서 나가버린 타사 럭셔리 세단들과 팽팽한 경쟁을 벌일 수 있을까. XJ 중에서 가장 스포티한 5.0SC SWB를 타봤다.》 ○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디자인
세계적으로 수천 종의 자동차가 있지만 아름답다는 단어를 적용 할 수 있는 모델은 극히 드물다. 멋지고 비싸 보인다거나 섹시하다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모델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아름답다는 표현은 기계적인 균형감에서부터 미학적인 완성도를 갖춰야 가능하다.
외관의 각 부분을 뜯어보면 그다지 예술적으로 휘어지는 곡선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직선도 없지만 그 하나하나의 선과 면이 종합적으로 이뤄내는 결과물은 걸작 조각품 같다. 풀잎에서 떨어진 물이 낙하하면서 빚어내는 유선형과 빛의 반사를 고화질 사진기로 찍어낸 뒤 차에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실내 디자인도 독특하다. 호화 요트를 모티브로 만든 인테리어는 마치 도로 위를 항해하는 듯한 기분을 준다. 질감과 색감의 통일을 위해 센터페시아와 대시보드 마감재는 각 차량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나오는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비되는 색상의 이중 스티치로 장식된 천연가죽 시트는 ‘한땀 한땀’ 장인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져 최고급 서재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 스포츠카가 울고 갈 가속 성능
XJ 5.0SC는 슈퍼차저가 적용된 5.0L급 V8 엔진이 들어가 2500rpm부터 무려 63.9kg·m의 힘을 뿜어낸다. 가속하기 위해 슬쩍 발만 올려놓아도 강한 힘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최고출력은 510마력, 제원상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에 이르는 가속시간은 4.9초다. 정밀측정기로 직접 재어보니 5.0초가 나왔다. 노면이 차갑고 염화칼슘이 깔려 있는 미끄러운 상태라 측정 조건이 좋았다면 제원 이하로도 가능해 보였다.
전반적으로 5.0SC는 출력을 꺼내 쓰기가 너무 쉽다. 출력의 밀도가 각 rpm마다 빽빽이 차 있어서 운전자가 힘을 꺼내서 쓰고자 할 때 엔진은 아무런 부담감 없이 그 힘을 건네준다. 초고성능 자동차의 특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속페달의 세팅이 좋아서 큰 힘을 다루기가 어렵지 않다. 브레이크의 성능도 대단히 우수해서 510마력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2억 원에 이르는 자동차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운전자를 겁주지 않으면서 엄청난 엔진의 힘을 노면에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이전의 재규어와 비교해볼 때 출력을 꺼내 쓰고 자제시키는 능력이 상당히 높아졌다. 한때 세계 최고속도 기록을 가지고 있던 모델인 ‘XJ220’을 만든 기본기가 어디 가지는 않았나 보다.
5.0SC는 경쟁사의 7단 혹은 8단 변속기보다 단수가 낮은 ZF사의 6단 변속기를 적용했지만 엔진과의 궁합이나 변속 스피드, 동력 직결감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는 없었다. 시속 200km를 15초에 끊어버리는 폭발적인 엔진파워를 가졌지만 연료소비효율(연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시내주행 연비가 L당 6km 안팎, 고속도로 정속주행에서는 L당 12km도 가능했다. 효율이 높은 엔진에다 동급에서는 가장 가벼운 알루미늄 차체도 한몫을 한 것 같다. XJ의 동력성능이나 효율성, 브레이킹 성능과 차체 밸런스 등은 독일산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시승한 차종은 아니지만 3.0L급 디젤엔진 모델은 배기량에 비해서는 월등한 275마력, 61.2kg·m의 힘을 자랑하며 시속 100km까지 가속시간은 6.4초에 불과해 동급 최강의 실력을 가졌다.
○ 2% 아쉬운 부분들
자동차의 성능을 결정하는 2가지 중요한 요소만 꼽는다면 동력성능과 서스펜션이다. 일단 5.0SC의 서스펜션은 스포티함과 안정성에 있어서는 510마력을 통제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승차감은 조금 아쉽다.
타사의 동급 모델들은 전륜과 후륜 모두 에어스프링을 쓰면서 저속주행을 하거나 거친 노면에서는 부드러운 승차감을, 고속주행 때는 스포티한 느낌을 준다. 재규어는 후륜에만 에어서스펜션이 들어간 탓인지 거친 노면에서 많이 튄다. 20인치 휠을 소화하기에는 서스펜션의 적응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벤틀리 ‘콘티넨털 슈퍼스포츠’나 포르셰 ‘파나메라 터보’의 서스펜션은 분명히 많이 튀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이고 튀는 과정이 설득력 있는데, 5.0SC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핸들링이 스포츠카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다. 타이어 사이드월을 높인 19인치 휠만 들어가도 괜찮아질 듯하다.
소소한 몇 가지를 더 지적하자면 운전석 발아래 따뜻한 바람이 오른쪽 발로만 집중돼 왼발이 약간 시렸다. 오른발은 ‘적도’인데 왼발은 ‘시베리아’다. 쿠페스타일 디자인을 살리다 보니 뒷좌석 천장의 높이가 낮아서 키가 180cm 이상인 탑승자는 약간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국내에서 많이 팔리지 않는 브랜드임에도 자동차 시스템 메뉴 중 일부를 한글화한 점은 칭찬받을 만지만 글자 폰트가 초등학생이 또박또박 적은 고딕체 같은 폰트여서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를 해친다.
○ 재규어만의 매력
운전석과 동반석에서 보는 시야각에 따라 화면이 다르게 보이는 중앙 듀얼모니터 시스템도 특이하다. 한 화면이지만 운전석에서는 내비게이션이 나오고, 동반석에서는 TV나 DVD 영화감상을 할 수 있다. 또 바우어스&윌킨스(B&W)사의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은 지금까지 들어본 카오디오 중 톱3에 들어간다.
눈길과 후륜구동은 악연이지만 스노 버튼을 누르고 운전을 하면 평지나 약한 오르막길은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었다. 이 기능은 연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됐다.
배기음도 좋았다. 독일산 대형 럭셔리 세단들은 나름대로 배기 사운드를 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렉서스처럼 ‘무소음’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영국산 재규어는 아직은 야수의 으르렁거림이 남아 있다. 뒷좌석에서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크기지만 존재감은 상당하다. 독일어와 차별되는 영국식 발음을 내겠다는 재규어의 의지로 보인다.
서스펜션 등 몇 가지 개선할 점이 보이지만 재규어니까 이해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명품시계 롤렉스는 꼭 시간을 보기 위해 차지는 않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