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의 TLI(Technology Leaders & Innovators) 본사를 찾았을 때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TLI는 컴퓨터 모니터, TV패널 등에 들어가는 핵심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 그러나 회사 건물은 아파트촌과 상가빌딩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어 겉보기에 전혀 반도체를 만들 곳 같지 않았다.
회사 안에 들어가서도 의아함은 계속됐다.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공장 풍경을 상상했지만 그 안엔 거대한 생산설비도, 얼굴만 내놓은 하얀 옷차림의 연구원들도 없었기 때문. 그 대신 대학생 같은 캐주얼 차림의 직원 100여 명이 그저 책상에 놓인 두 개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복잡한 설계도와 수식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눈에 봐도 가진 것은 ‘머리’와 ‘책상’뿐인 이 회사는 그러나 2009년 한 해 동안 1000억 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렸다. 정만기 지식경제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은 “이것이 팹리스(fab-less·공장이 없는) 기업의 힘”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업계에서 팹리스 기업이란 반도체의 설계만을 담당하는 전문기업을 말한다. TLI와 같은 팹리스 기업들은 첨단 디지털 기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시스템반도체’를 설계하는데 최근 스마트폰, 태블릿PC, 3차원(3D) TV 같은 기기 수요가 폭증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경부 관계자는 “국내에서 반도체 하면 삼성전자가 만드는 메모리반도체(데이터 저장용)만 생각하는데 실제 세계 시장은 시스템반도체 시장이 메모리반도체보다 4배나 더 크다”며 “올해 수출 전망도 메모리반도체는 전년보다 9.3%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는 반면 시스템반도체는 18.7%나 성장할 것으로 분석됐다”고 말했다.
시스템반도체는 대량 일괄생산이 가능한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각 제품에 맞는 반도체를 사람이 일일이 설계해야 한다. TLI의 경우에도 직원의 60% 이상이 전자공학을 전공한 석박사급 인재들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시스템반도체는 ‘인재 중심’ 산업인데 반도체 설계 역량이 있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이런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교수조차 우리나라를 통틀어 30명에 불과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세계적 팹리스 기업으로 유명한 미국 퀄컴사의 경우 반도체 설계 인력만 1만3000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점유율은 50%를 넘지만 시스템반도체 시장점유율은 3%에 그친다. 시스템반도체 역량이 없다 보니 국내에서 만들어 수출하는 스마트폰, 자동차 등에도 수입 반도체를 장착하는 실정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지난해 한국은 메모리반도체를 수출해 285억 달러(약 32조 원)를 벌었지만 이 중 186억 달러가 시스템반도체를 수입하는 돈으로 다시 빠져나갔다”고 했다.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들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시스템반도체 사업부를 집중 지원하고 있다”며 “특히 이재용 사장이 시스템반도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최중경 지경부 장관은 이날 취임 후 첫 현장방문지로 TLI를 찾아 “시스템반도체 역량이 높아져야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라며 “향후 시스템반도체 인력 양성 및 업체 대형화를 집중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성남=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 시스템반도체 ::
메모리반도체가 정보 저장에 이용되는 데 반해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는 중앙처리장치(CPU)처럼 정보 처리를 목적으로 한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첨단 디지털 기기의 ‘뇌’에 해당하는 반도체로 최근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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