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현 OCI 부사장은 18일 오전 3시 반이 되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의 역사에 대한 중학생 큰딸의 과제물을 함께 만들다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한 것. 같은 시각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깨어 있었다. 정 부회장은 힙합 그룹 다이나믹듀오의 ‘불면증’을 들으며 자신의 트위터에 가사를 적어 올리고 있었다. ‘이른 밤 난 또다시 낡은 기타∼∼를 잡아 지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이 부사장은 야밤에 트위터에서 정 부회장을 보고 “이 야심한 밤에 뭐 하시남? ㅋ 난 애 숙제 같이 하다 정작 내 일 다 못해서 고생 중. ㅜㅜ 빨리 주무시오!”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1968년생 동갑인 이 부사장과 정 부회장은 트위터에서 ‘맞팔’(서로 팔로)하는 사이다.
재계 차세대 리더들은 왕왕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공개한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생활을 일절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 그들의 아버지 세대와는 사뭇 다르다. 재계 차세대 리더들과의 e메일 인터뷰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 평범? 그래도 조금은 다른
재계 차세대 리더들도 가정에서는 평범한 아빠, 엄마와 다를 바 없다. 15일이 생일이었던 이우현 부사장은 두 딸이 생일선물로 준 아이패드용 파우치를 받고 기분이 좋아져 “예쁘지 않으냐”며 주변에 자랑을 했다. 이 부사장이 받은 파우치는 서울 중구 소공동 지하상가 수입품 가게에서 파는 이탈리아산이다. 가격은 10만 원 안팎으로, 중산층 이상 가정의 중학생이라면 용돈을 모아 살 수 있는 수준이다.
식도락가인 정용진 부회장은 다이어트가 큰 관심사다. 그의 트위터를 보면 ‘(다이어트한다면서) 콜라 라이트(열량이 적은 콜라) 시키고 프라이는 다 먹는다’ ‘내일 운동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등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애견가이기도 한 정 부회장은 트위터 홈 ID 사진으로 애견 ‘마리’를 끌어안고 찍은 모습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일상이 평범하지만은 않다. 보통 집안의 자녀라면 꿈도 못 꿀 일을 거뜬히 현실로 이뤄놓기도 한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5월 항공기 격납고에서 스타크래프트 결승전을 열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막내딸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보의 작품이다. 스타크래프트에 흠뻑 빠져있는 조 상무보는 지난해 6월에는 항공기 두 대에 ‘스타크래프트 Ⅱ’ 캐릭터 그림을 입히기도 했다.
재계 3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로 이어가기도 한다. 정지이 현대U&I 전무는 지난해 12월 4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클럽에서 지인들과 함께 신체장애 어린이 수술비 지원을 위한 자선파티를 열었다.
입장료를 모아 모두 수술비로 지원하는 취지의 이 행사를 위해 정 전무는 공짜로 공연해줄 밴드를 손수 물색했다. 재벌가 자녀라면 연예인 한두 명쯤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정 전무는 “알고 지내는 연예인이 없어 부탁할 데가 없었다”며 “무료로 공연해 줄 맘 좋은 밴드 없느냐”고 묻고 다녔다. 결국 행사를 함께 준비하던 정 전무의 친구가 추천한 밴드를 통해 자선파티를 성황리에 끝냈다. ○ ‘후계자 스트레스’ 동병상련
평범한 직장인의 눈에는 젊은 나이에 일찍 임원으로 승진해 경영 수업을 받는 차세대들이 부러워 보이지만 당사자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에게 리더라는 지위는 사뭇 비장하게 다가온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중인 금호타이어가 리더십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더 이상 미래는 없다”며 “목숨을 걸고 기업을 지킨다는 마음”이라고 답했다.
이 같은 고충이나 스트레스는 연배가 비슷한 다른 그룹 차세대들과 만나서 풀기도 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경복초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조현식 한국타이어 사장, 구본상 LIG넥스원 사장과 자주 만난다. 조 사장은 “만나면 일 얘기는 잘 안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에는 정 부회장에게 ‘너희는 어떻게 준비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정 부회장과 가끔 만나 골프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정 부회장은 사석에서 이 사장을 ‘재용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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