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더 커지는 위협.’ 지난해 12월 미국의 자동차전문지인 모터트렌드가 ‘2011년 세계 자동차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을 발표했을 때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뒤에 붙인 표현이다. 이 리스트에서 정 회장은 도요타의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을 제치고 5위를 차지했다.》 디자이너나 최고재무책임자(CFO)들도 이름이 보이지만, 이 순위의 상위에 링크된 사람들은 대부분 최고경영자(CEO)이다. CEO가 중요하지 않은 산업은 없지만 자동차산업은 CEO의 역량이 어떤 부문보다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치산업과 소비재산업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 엄청난 선제 투자가 필요하면서도 경기에 민감해 몇 년 뒤를 내다보는 비전과 ‘뚝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업계를 움직이는 이들 ‘파워 맨’을 알아봤다.
○ ‘미국의 영웅’ 된 포드 멀랠리
지난해 말 모터트렌드의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앨런 멀랠리 포드 CEO다. 멀랠리 CEO는 2009년 같은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지난해 7월 오토모티브 뉴스가 선정한 ‘2010 자동차업계 최고 CEO’ 순위에서도 북미 지역 1위를 차지했다.
포드는 세계 경제위기 때 몰락했던 미국차 ‘빅3’ 회사 중 유일하게 파산조치 없이 위기를 극복해냈고, 지난해에는 최근 11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순이익을 내고 고객충성도 1위도 차지했다. 포드가 미국 자동차업계의 회복세를 주도하면서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하는 올해의 기업인 독자 투표에서 스티브 잡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등 멀랠리 CEO도 ‘미국의 영웅’이 돼가는 분위기다. 2006년부터 포드 CEO를 맡은 그는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매각하고 강한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수익이 나는 부분에 집중해 회사의 회생을 이끌었다. 그런 그가 도요타 생산방식의 열렬한 팬으로 자동차가 아닌 항공기회사 보잉에서 37년간 일한 항공기 엔지니어 출신이며, 포드로 올 당시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게 있나’라는 반응을 얻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다.
2위를 차지한 사람은 ‘유럽 자동차의 왕’ 페르디난트 피에히 폴크스바겐그룹 이사회 의장이다. 피에히 의장의 후임인 폴크스바겐그룹 마르틴 빈터코른 회장은 같은 리스트에서 4위에 올랐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700만 대를 넘게 판매하고 세계 시장 공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 2018년까지 세계 1위의 자동차회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폴크스바겐그룹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포르셰 가문의 후계자인 피에히 의장은 오너 집안이지만 포르셰와 아우디에서 수십 년간 자동차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폴크스바겐그룹 회장 시절 강력한 카리스마로 회사의 부흥을 이끌었다. 빈터코른 회장 역시 연구개발자 출신이며 지금도 그룹 연구개발(R&D) 총책임을 맡고 있다.
○ 전설적인 업적과 야심, 르노-닛산 곤
빈터코른 회장이 ‘가장 심각한 경쟁자’로 꼽은 회사가 어디일까. 바로 한국의 현대차다. 지난해 오토모티브 뉴스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2010년 자동차업계 아시아 최고의 CEO’로 뽑으면서 “품질 면에서 꾸준하면서 획기적인 향상을 이룩했고 미국 경영진에게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정 회장은 2005년에도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의 성공적인 가동과 품질 경영을 인정받아 오토모티브 뉴스의 자동차업계 아시아 최고의 CEO 자리에 오른 바 있다. 취미도 없이 일에 전념하고, 자동차 품질 향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밀어붙인다는 평가다.
모터트렌드 순위에서는 정 회장보다 2계단 더 높은 위치에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CEO가 있다. 1996년 2조 엔(약 26조7000억 원)이 넘는 부채에 시달리던 닛산에 취임한 그는 처음에는 “외국인 경영자는 일본 문화가 숨쉬는 닛산(日産)을 제대로 경영할 수 있을 리 없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들었다. 그러나 전체 사원의 14%에 해당하는 2만1000명을 감원하고 4200억 엔(약 5조6000억 원)어치의 자산을 매각하는 대대적인 개혁으로 닛산을 살려냈고, 외국인 경영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훈장인 ‘남수포장’을 받았다. 2005년 르노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닛산과 르노의 CEO를 겸하고 있다.
곤 CEO는 지금까지의 업적도 신화적이지만 앞으로의 야망도 대단하다. 주요 자동차회사 CEO 중 전기차에 대한 신념이 가장 확고해 르노의 전기차 ‘Z.E.’ 시리즈와 닛산 전기차 ‘리프’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동차업계 판도를 흔들겠다는 심산이다. 200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는 “한국 정부의 지원 폭에 따라 한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 아직 잘 알 수 없는 도요다 아키오
세계 1위의 자동차회사인 도요타의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대규모 리콜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모터트렌드 순위에서 10위 바깥으로 밀렸다. 오너 가문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2009년 취임한 뒤 곧바로 리콜 사태를 겪느라 업적을 보여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뱁슨대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1984년에 도요타에 입사했다.
GM의 대니얼 애커슨 회장 겸 CEO도 27위에 겨우 이름을 올렸다. 취임 뒤 지난해 11월 기업 공개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GM의 부활을 대외적으로 알린 게 그의 공이다. 파산 상태의 GM을 단기간에 정상화시킨 것은 에드워드 휘태커 전 CEO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모터트렌드 순위에서는 44위에 GM유럽 담당 사장인 닉 라일리가 뽑힌 것도 눈길을 끈다. GM대우자동차 사장 시절 회사 경쟁력을 높이고 노사문화를 원만하게 가꿨으며 한국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피아트그룹과 합병한 크라이슬러그룹에서는 2009년 6월 임명된 이탈리아 출신 세르조 마르치오네 CEO가 피아트와 크라이슬러 양측의 전략적 제휴와 경쟁력 제고에 열중하고 있다. 특히 마르치오네 CEO는 피아트가 25년 만에 미국 재진출을 앞두고 미국 내 딜러 네트워크를 재정비하고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때 매각설이 나돌던 피아트를 부활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연구개발자 출신으로 혼다 기술연구소 사장을 지낸 이토 다카노부 혼다 사장은 지난해 7월 ‘좋은 제품을 빨리, 저렴한 가격으로, 저탄소로 제공한다’는 내용의 ‘비전 2020’을 제시했다. 그는 구체적인 목표로 신흥국을 중심으로 생산 현지화를 추진하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연료전지전기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발표했다.
1987년부터 BMW에서 일해온 노버트 라이트호퍼 BMW그룹 회장은 BMW 역사의 산 증인이라 불린다. 2006년 회장 취임 이후 ‘넘버 원 전략’을 펼쳐 가파른 성장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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