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속 드러나는 한-EU FTA 번역오류… 5가지 오해와 진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15일 03시 00분


[1]외교부만의 잘못인가?… 2차번역은 담당 부처 책임

《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4월 중 처리하고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상반기 중 처리해 양 FTA를 연내에 발효시키려던 정부의 계획이 크게 어그러지고 있다. 11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비준동의안을 단독 상정했던 한나라당은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15일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야당은 번역 오류가 나온 협정문 한글본의 전면 재검토가 우선이라며 비준 저지로 맞서고 있다. ‘문제가 너무 없는 것이 문제’라던 한-EU FTA 국회 처리가 이렇게까지 꼬이게 된 이유와 번역 오류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5가지로 나눠 살펴봤다. 》
번역 오류 문제가 정치권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은 4·27 재·보궐선거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FTA 찬성론자들조차 할 말이 없게 만든 이번 번역 오류 문제는 야당엔 호재이고 여당엔 뼈아프다. 다른 것도 아닌 업무 능력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일 잘하는 정부’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에 치명타를 입혔고 외교부는 ‘특채 파동’ ‘상하이 스캔들’에 이어 3연타를 맞았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거듭 고개를 숙이고, 전 직원이 매달려 밤샘 작업을 하며 모든 협정문을 일일이 뒤지는 것도 외교부 내에선 이 사태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직원들 사이에선 ‘우리가 다 뒤집어쓰고 있다’는 불만도 크다. 초벌 번역은 외교부가 하지만 2차 번역은 협상 당시 서비스, 농업, 의료 분과 등을 담당했던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등 각 부처가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공동 책임이 있는 셈이지만 연대 책임을 질 경우 비판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우려다. 정부 관계자는 “‘전체 부처가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보단 외교부가 대표로 매를 맞는 것이 낫지 않냐”고 말했다.

[2]인턴에게 번역시켰나?
모집공고에 ‘협정문 검토’ 들어있어


국회 외통위에선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EU FTA 번역에 참가했던 외교부 직원 명단을 제출하라고 수차례 요구했지만 통상교섭본부가 이를 묵살하고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가운데 외교부가 행정인턴들에게 번역 업무를 상당 부분 맡겼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실제 외교부가 행정인턴을 모집하는 공고문에는 담당하는 업무 내용 중 하나로 ‘FTA 협정문 법률검토 수정 및 편집’이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1000쪽이 넘는 협정문과 수백 개에 달하는 양허표를 일일이 사무관들이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며 “관행적으로 인턴들이 상당 부분 번역 내지 검독을 맡아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3]한글본은 참고본인가?
영문이 정본… 한미FTA는 둘다 효력


외교부가 FTA 협정문 번역 업무를 ‘가욋일’로 여기며 소홀히 여겼다는 점 때문에 한글본을 경시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실제 협정 당사자인 양쪽 국가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닐 때에는 협상언어인 영어 협정문이 정본이고 양 국가의 번역본은 법률적 효력은 없다. “번역본은 그야말로 실무를 위해 만들어 놓는 것이며 실제 기업인들이 무역을 할 때 한글본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다”라는 외교부 내부의 목소리는 한글본에 대한 외교부의 이러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한국이 맺어온 다른 FTA와 달리 한-EU, 한미 FTA는 영어본과 한글본이 동등한 정본이 된다는 것이다. EU에선 영어가 27개국의 공용어이고 미국에선 그야말로 모국어이기 때문에 영어본만 정본으로 삼을 경우 형평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 결국 외교부는 정본의 효력을 갖는 한-EU, 한미 FTA 협정문 한글본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4]외부 감사 없어 오류 자초?
로펌 검독도 오류 많아… 문제는 시간


외교부는 번역 오류가 발견된 초기부터 시간과 인력의 한계를 번역 오류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한-EU FTA 재검독 작업이 진행 중이던 지난달 김 본부장이 “외부에 감사를 맡긴 협정문 본문에서는 오류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예산 부족으로 모든 부분을 맡길 순 없었다”고 토로한 것도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4월 4일 한-EU FTA 한글본 재검독 결과 발표에서 외부 검독을 맡긴 본문에서도 32건의 오류가 나오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아예 유명 로펌에 재검독 작업을 맡겼던 한미 FTA에서조차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다만 최소 석 달 이상 시간을 확보하고 전담 번역팀이 충분한 검독을 하는 다른 나라와 달리 국내 여론과 국회의 요구로 한 달 만에 한글본을 내놓는 관행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5]한미FTA에도 걸림돌?
‘쉬운 숙제’ 먼저하려다… 돌파구 고심


정부는 당초 한-EU FTA와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함께 처리할 것을 검토하다 한-EU FTA는 논란거리가 거의 없는 만큼 쉬운 숙제를 먼저 하고 어려운 숙제(한미 FTA)를 나중에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한-EU FTA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인 번역 오류 문제가 터지면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은 당분간 명함을 내밀기도 어려워졌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때 김 본부장의 사퇴도 고려했지만 현안이 많다는 이유로 주저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지난주 미국-콜롬비아 FTA 쟁점현안 협상이 타결돼 한미 FTA 발효를 위한 모든 준비가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음이 급해지고 있는 한국 정부는 돌파구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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