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유럽연합(EU) 의회와 이사회(Council) 및 집행위원회(Commission)가 위치해 ‘유럽의 수도’로 불리는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했다. EU 27개 회원국 대표와 관료 및 전문가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절충해 가며 합의를 도출해 내는 모습이 마치 세계 정부를 연상케 했다. 이곳을 방문했을 때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포르투갈의 구제금융 신청과 33개월 만에 유럽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유럽이 들썩거렸다.
독일 국민 사이에선 ‘왜 우리가 재정위기를 겪는 회원국의 국민을 도와줘야 하느냐’는 불만이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유럽정책센터의 한스 마르텐스 소장은 재정위기로 유럽 회원국 간 빈부갈등이 심해졌으며 이는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의 관계자들은 EU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다. 유럽중앙은행 금융통화결정위원회의 한 멤버는 “다른 나라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EU 회원국은 수십 년간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U는 회원국의 공동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며, 시행착오를 통해 서로의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정착시켜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돌아오니 브뤼셀에서 목격했던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광경이 펼쳐졌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상정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위에서는 또 한 차례 심한 여야 간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국과 EU가 합의한 7월 1일 한-EU FTA의 발효를 위해 유럽의회가 지난달 일찌감치 비준동의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킨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정부가 한-EU FTA 협정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번역 오류를 저지른 게 단초가 되었지만 오류를 고쳐 상정한 비준동의안을 놓고 다시 정쟁(政爭)의 도구로 삼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4·27 재·보선을 앞두고 여야 간 기선 잡기에 엉뚱하게도 한-EU FTA 비준동의안이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EU에서도 한-EU FTA 협정문을 놓고 회원국 간에 견해차가 컸다.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 EU가 상대적인 손해를 볼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자동차산업의 비중이 큰 이탈리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27개 회원국 간에도 세부적인 사안을 두고 이해관계가 각각 엇갈렸다. 그러나 EU 집행위원회, EU 이사회 및 유럽의회는 이런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했다. 각국의 이해관계를 잠재운 것은 EU 회원국 전체가 이번 FTA로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1월 유럽의회를 방문한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유럽의회의 상임위원회인 국제통상위원회에서 FTA 관련 법안이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이뤄져 매끄럽게 처리되는 모습에 부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나라들이 모여 하나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유럽의회와, 단일 국가에서 매번 본질과 벗어난 사안으로 몸싸움을 일삼는 한국의 국회. 한-EU FTA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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