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갑니다, 잘하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오전 ‘부실 감독’으로 금융감독의 신뢰 위기를 자초한 금융감독원을 전격 방문해 간부 직원들을 강하게 질책한 뒤 굳은 표정으로 금감원을 나서고 있다. 이 대통령은 “금감원이 최대 위기를 맞았으며 국가 신뢰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권혁세 금감원장(왼쪽부터)이 배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부실 감독’의 거센 후폭풍으로 벼랑 끝에 선 금감원의 조직을 일신하기 위해 한 달여 장고(長考) 끝에 내놓은 자체 쇄신방안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사실상 ‘퇴짜’를 맞았다. 부산저축은행그룹 사태에서 드러난 금감원의 부실 감독, 전·현직 직원의 비리, 금융회사와의 유착전력 때문에 금융감독 당국을 더는 신뢰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스스로 개혁하겠다는 말은 믿지 못하겠으니 관계기관과 외부 전문가로부터 ‘수술’을 받으라는 것이 대통령의 주문이었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쇄신방안을 내놓았지만 (대통령이 거부하면서) 이제는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 대통령의 신뢰를 잃은 금감원
권 원장은 4일 금감원을 전격 방문한 이 대통령에게 전 직원에 대한 청렴도를 평가해 점수가 낮은 직원은 인허가, 공시, 조사 등 비리가 발생할 위험이 큰 부서에서 모두 빼겠다고 보고했다. 또 전·현직 임직원을 금융회사의 감사로 추천하던 관행을 철폐하고, 설령 금융회사로부터 감사추천 요청이 있더라도 이를 거절하겠다고 밝혔다. 직원윤리강령도 개정해 금품 수수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면직 등 중징계를 하고 비리사건의 행위자, 감독자, 차상급자에게 연대 책임을 물을 방침이라고 보고했다. 특히 공직자 재산등록 대상을 현행 2급 이상에서 4급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금감원 직원 1600여 명 가운데 재산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대상이 220여 명(14%)에서 1230여 명(77%)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대통령은 냉정했다. “지금까지 금감원에서도 많은 제안을 했다. 그대로만 된다면 많은 발전이 있을 줄 안다”면서 “여러분의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금감원의 자정 노력에만 기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 대통령은 최근 수사기관으로부터 비공개 보고서를 제출받은 뒤 금감원의 유착 관행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며 강도 높은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고 판단해 이날 전격 금감원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검찰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보고서에는 부산저축은행과 관련해 금감원 인사들의 유착과 비리 불감증의 실상이 담겨 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한 참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침 발언은) 작심하고 한 얘기다. 언론에 제대로 잘 전달됐느냐”고 확인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 금감원 개혁안은 ‘근본적 고민 없어’
금감원은 이 대통령이 자체적으로 만든 개혁방안에 대해 ‘이미 신뢰를 잃었다. 제3자가 맡아서 근본적 해법을 내놓으라’고 지시하자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당초 권 원장은 쇄신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오전 11시 20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발표하려고 했으나 회견 시작 25분을 앞두고 돌연 취소하고 보도자료만 배포했다. 이후 “쇄신방안을 토대로 관계기관 TF를 구성해 더욱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금융감독 쇄신방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실제로 이번 쇄신방안에 대해 금감원 내부에서는 임직원에 대한 ‘채찍’만 세졌을 뿐 현재 금융감독 시스템이 가진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거의 모든 금융회사를 감시하는 거대 통합감독기구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금융시스템의 내부 견제기능이 약해지고, 비리가 발생하기 쉬운 구조로 변질됐다는 일각의 지적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금감원 관계자들조차 “요즘 부산저축은행그룹 사태를 보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실감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쇄신방안에 ‘절대 권력’이라는 기득권을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 등 관계기관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해 꾸릴 TF에서는 쇄신방안에 ‘플러스알파(α)’가 담긴 고강도 대책이 포함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특히 금감원이 독점하는 현재의 금융감독 체계와 관련해 ‘견제와 균형’이 가미된 금융감독 시스템 구축 방안이 제시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런 견제시스템이 없으면 ‘제2, 제3의 부산저축은행그룹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주장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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