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한-EU FTA는 7월 잠정 발효될 예정이다. 정부는 “앞으로 한국산 자동차와 전자제품의 유럽 수출이 힘을 받게 됐다”며 “그덕분에 한국은 앞으로 최대 5.6%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와 연평균 3억6000만 달러의 무역흑자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국내 농축산업 분야는 사정이 다르다. 한-EU FTA 체결로 인한 피해의 90% 이상이 이 부분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정부 분석에 따르면 국내 농축산업계는 앞으로 15년간 약 2조2000억 원의 피해를 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축산업계의 피해 규모만 2조 원에 이른다. 축산분야는 유럽과의 가격·품질 경쟁에서 경쟁력이 가장 떨어지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FTA 체결에 따른 국내 농축산업 타격은 비단 유럽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과 타결한 FTA가 발효될 경우 피해는 이보다 훨씬 커진다. 정부는 한미 FTA 발효가 국내 농업분야에 10조 원, 이 중에서도 축산업 분야에 7조 원 규모의 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미, 호주 등 농축산 강국과의 FTA가 줄줄이 예정돼 있어 한국의 ‘식탁’을 둘러싼 해외의 시장개방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 협상국 상당수가 ‘농업 강국’
그간 우리 정부는 국가 성장전략의 일환으로 80여 개에 이르는 나라와 동시다발적인 FTA를 추진해 왔다. 이미 칠레,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인도 등 17개 나라와 FTA를 체결·발효했고 EU(27개국), 미국, 페루 등과는 협상을 타결하고 발효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협상을 진행 또는 준비 중인 나라도 호주, 캐나다, 중국, 콜롬비아 등 20여 개에 달한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세계적인 ‘농업 강국’이란 점이다.
특히 지난해 양국 간 FTA 체결 공동연구를 마친 한중 FTA의 경우 국내 농업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중국은 유럽 미국과 달리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신선식품 분야에도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야채 꽃 등 신선품목은 국내 농가들의 주요 수입원이란 점에서 타격이 상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FTA 체결을 논의 중인 상대국들이 모두 미국 EU 수준의 높은 개방을 요구하는 것도 한국으로서는 골치다. 통상분야의 한 관계자는 “가장 큰 문제는 호주 캐나다 등도 최소한 미국 수준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특히 호주의 경우 쇠고기는 미국과, 낙농품은 EU와 품목이 겹쳐 협상에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통상 분야의 한 관계자는 “현재 정부는 자동차 수출 잠재력이 큰 지역을 중심으로 FTA를 추진하고 있는데 그 대가로 농축산업 분야는 거의 그대로 내주고 있는 판”이라며 “최근 국제 곡물가격 급등 및 기상이변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통상개방 과정에서 ‘식탁’ 분야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농가 입막기식 대책 재정낭비 심해
그러나 국가 수입의 대부분이 ‘수출’에서 나오는 상황에서 실제 정부의 협상 관심은 농업 분야보다 제조업 분야에 쏠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제대로 한다면 국내 농가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키워줄 대책을 마련한 뒤 협상을 타결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제조업 분야의 조건이 맞으면 일단 FTA는 타결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역시 협상 전 단계에서 충분한 숙고를 하지 않다가 타결 후 ‘돈’으로 농심(農心)을 달랜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한-EU FTA 비준 과정에서도 정부는 △8년 이상 직접 운영한 면적 990m²(300평) 이하의 축사와 토지 처분 양도세를 100% 감면해주고 △EU 지역 수입품 때문에 농산물 가격이 FTA 이전 가격의 85% 이하로 떨어질 경우 차액의 90%를 직불금 형태로 보전해 주는 등의 지원책을 마련하기로 약속하고서야 야당의 비준 동의를 얻어냈다.
문제는 이런 지원책들이 ‘정치적 합의’의 산물로 나오면서 재정 배분의 비효율성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축산농가에 대한 양도소득세 면제 요건은 ‘8년 이상 직접 운영한 목장면적 990m² 이하의 축사·부수토지를 폐업 시 양도할 경우’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기획재정부와 국세청에선 8년 동안 계속 목장을 운영했는지 여부, 실제 990m² 이하의 땅을 축사와 부수토지로만 사용했는지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 지원예산 상한선 정한 뒤 효율적 배분을 ▼
정부 관계자는 “농가에 국세청 공무원 등이 일일이 찾아가지 않는 이상 입증하기 어려운 요건들”이라며 “논의 과정에서도 이런 문제점이 제기됐지만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야당의 요구가 그대로 관철됐다”고 말했다.
FTA 발효 후 농축수산물 가격이 FTA 이전 가격의 85% 이하로 떨어질 경우 차액의 90%를 직불금 형태로 보전하도록 한
것(소득보전직불제)도 대표적인 ‘돈 풀기식’ 대책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직접적으로 돈을 보전해주는 방식의 지원은 농가의
근본적인 경쟁력 강화보다는 농가 달래기용의 성격이 짙기 때문. 또 가격 하락의 원인이 FTA로 인한 수입 증가뿐 아니라 기후나
작황 등 다른 요인 때문일 경우 이를 분리해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협정 발효 후 5년간 운용하기로
한 ‘폐업지원제도’ 역시 이미 한-칠레 FTA를 통해 문제로 거론된 바 있다. 한-칠레 FTA 당시 2008년까지 운용하기로
했던 폐업지원제도의 경우 실제로는 칠레로부터 수입이 되지도 않았던 복숭아 농가에 1796억 원, FTA 이후 오히려 국내산의
가격이 오르고 재배면적도 늘었던 키위 농가에 51억 원이 지원돼 재정낭비 요소가 컸다. 이 때문에 품목을 사전에 지정하던 것을
2007년부터는 사후 지정으로 바꾸긴 했지만 폐업 후 다시 경작하는 등 법을 악용한 사례가 94건이나 적발돼 97억 원이 환수되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협상 과정에서부터 피해 업계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오히려 이를 대외 협상에 활용하는 미국 등과 달리, 우리나라는 사전 공청회 때는 의원들이 관심도 갖지 않다가 비준이 임박해 단기
대책을 내놓는 식의 행태가 되풀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허 교수는 “FTA 피해 분야에 대한 지원 예산의 상한선을 정한 뒤 그
안에서 효율적으로 재원을 배분해야 ‘우는 아이 젖 더주기’식으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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