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개 자동차회사가 부품 50% 이상을 의존하는 독과점 협력업체 수가 18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국내 완성차 5개사의 1차 협력업체 890여 개의 20%에 이른다. 이 회사 가운데 한 군데만 납품을 중단해도 5개사의 자동차 생산량이 절반 이상 줄어드는 셈이다. 피스톤 링을 만드는 유성기업의 파업이 이달 말까지 계속되면 국내 5개 자동차회사의 생산 차질은 5만 대, 피해 규모는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23일 자동차업계와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제2 또는 제3의 유성기업이 언제든지 나타날 소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유성기업 외에도 ‘다스’나 ‘대원산업’은 현대·기아자동차 전체 시트 물량의 대부분을 납품하고 있다. 현대차가 공급받는 브레이크 드럼도 ‘명화공업’과 ‘부산주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2만5000개에 이르는 부품 중 하나만 없어도 생산이 안 되는 자동차업계의 특성상 작은 부품 하나가 연간 매출 81조 원에 이르는 국내 자동차업체 전체를 뒤흔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업계는 하루아침에 대체기업을 찾을 수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동차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한 부품을 여러 기업에서 나눠 납품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아 오히려 원가만 올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특정 업체의 ‘부품 독점’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3월 동일본 대지진 직후 세계 자동차업계는 광택 도료 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머크사에서 독점 공급하는 ‘시라릭’은 차량 도색 중 광택을 내는 페인트 안료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물질인데 시라릭 생산 공장이 지진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 후쿠시마 현에 있어 생산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이슬란드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도 비행기가 뜨지 못해 물류대란이 빚어지면서 부품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 BMW와 아우디, 닛산, 혼다 등 몇몇 자동차회사는 일부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 바 있다.
이런 부품 공급의 문제를 풀 방법은 ‘부품 공급처 다변화’이지만 이 또한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공급처 다변화’와 ‘품질 관리’ 사이의 딜레마 때문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품질관리를 위해서는 소수의 검증된 협력업체와 거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이번처럼 ‘검증된 협력업체’가 천재지변, 혹은 다른 이유로 흔들릴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특히 품질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정한 현대차는 부품업체들의 품질 관리에 더욱 엄격했고, 그 결과 특정 업체의 부품 공급 독점 현상이 더욱 심화됐다는 것이 자동차업계의 분석이다.
국내 자동차회사들의 국산화 연구가 대체 공급처를 찾기 어렵게 만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조합 관계자는 “현대차가 독자 엔진을 만들면서, 유성기업이 현대차 독자 엔진에 맞는 피스톤 링을 만든 것”이라며 “피스톤 링을 만드는 기업은 외국에도 있지만 독자 엔진에 최적화된 피스톤 링을 공급받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유성기업의 정상 조업을 제외하고는 이번 사태의 단기적인 해법은 없는 셈이다.
정부와 경제단체들은 이번 사태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23일 유성기업 노조에 대해 “1인당 연봉이 7000만 원이 넘는 회사의 불법파업을 국민이 납득하겠느냐”고 비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은 이번 사태에 우려를 나타내면서 정부가 즉각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현대·기아차 1, 2차 협력업체 대표단 20여 명도 유성기업 아산공장을 방문해 공장 가동 정상화를 촉구했다. 자동차회사가 생산을 중단하면 전체 5000여 부품협력사와 자동차 제조산업에 종사하는 27만여 명의 근로자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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