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준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의 주도로 촉발한 연기금 주주권 행사 논란이 한 달째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달 26일 마치 곽 위원장의 개인적인 ‘도발’처럼 시작된 연기금 주주권 문제는 청와대와 사전 협의가 있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한나라당과의 당정협의에 ‘조건부 수용’이라는 답이 나오면서 시행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시행에 대한 구호만 난무할 뿐 시행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심지어 대기업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경제개혁연대마저 “논의 과정이 심각하게 우려된다”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 한 달간 무엇이 달라졌나
주주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역시 원칙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 이 사안이 시끄러운 이유는 논의의 전개 방식 때문이다.
곽 위원장의 제안이 나오자 재계와 학계에서는 “연기금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관치 논란을 막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하지만 미래위는 물론이고 정치권과 부처 어디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없다.
전제 조건은 충족되지 않았는데 시행 논의는 마치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곽 위원장의 말이 나온 다음 날인 지난달 27일 정두언,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잇따라 “곽 위원장의 발언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한나라당 소장파의 힘이 곽 위원장에게 실렸다.
청와대가 곽 위원장의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은 것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이 사전에 국무회의에서 보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자꾸 흘러나왔다. 이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곽 위원장이 정부의 의지에 총대를 멘 것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 대통령이 16일 중소기업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기업의 총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곧이어 한나라당이 19일 당정협의에서 연기금 의결권을 조건부로 수용하기로 하자 이런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 포퓰리즘 비판 자초하는 난맥상
국민연금 기금 운용을 전담하는 기금운용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논란이 시작된 이후 시스템 개선에 대한 논의를 제안해 온 곳이 없다고 전했다. 관련 부처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는 곳이 없다. 한나라당도 19일 곽 위원장의 제안을 조건부로 수용하기로 결정했지만 견제 장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주영 정책위의장이 “관치 우려를 불식할 수 있도록 기금운영위원회에 별도의 독립기구를 만든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을 뿐이다.
이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안일 수 있는데도 정치권의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총선과 대선을 목전에 둔 정치권이 구체적인 실행 방안 없이 구호만 내놓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반값 등록금 논란이 전개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인 것이다. 하지만 곽 위원장은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 때부터 반드시 적용되도록 하겠다”며 속도를 높이고 있다. 정부가 워낙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반(反)재벌 단체마저 논의 과정을 우려하는 형국이 됐다. 경제개혁연대는 24일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관련 최근 논의 우려스러워’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연기금 의결권과 관련해 최근 진행된 일련의 논의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과 미래위 간에 논의되고 있는 제도개선안이 ‘지나친 경영 간섭’ 내지 ‘새로운 관치 수단’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해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정부가 동반성장이나 연기금 주주권 행사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서 논의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발표해 놓고 손을 놓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커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연기금 의결권 논란에 대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오히려 환영한다”고 말한 것이나, 정병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이 “지금도 하고 있고 당연히 찬성한다”고 말한 것이 재계의 냉소적인 시각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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