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회사들의 한시적 기름값 인하조치가 다음 달 6일 밤 12시로 끝난다. 이를 앞두고 일부 정유사의 물량 조절과 주유소의 사재기로 일선 주유소에 품절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27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GS칼텍스 주유소 주유기에 ‘휘발유 품절’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주로 출퇴근용으로 차를 쓰는 회사원 구재민 씨(36)는 매주 200km가량을 주행한다. 그는 “기름값이 L당 100원 내렸다고 하지만 싸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다음 달 7일부터는 다시 오른다는데 효과도 없는 걸 왜 내렸다 올렸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유소들은 공급가가 쌀 때 재고를 많이 확보해 놓으려는데 정유사에서 충분히 물량을 대주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정유회사들은 “2분기(4∼6월) 매출 손실도 큰 부담인데 물량을 내놓으라는 주유소와 ‘연착륙’을 주문하는 정부 사이에 끼여 한숨만 나온다”고 입을 모았다.
4월 7일부터 석 달간 정유회사들이 휘발유와 경유의 주유소 공급가격을 L당 100원 내리기로 한 조치의 시한이 열흘 남았다. 다음 달 7일 0시부터 소비자들은 ‘급격히’ 오른 기름값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정유회사와 주유소들은 기름값 환원에 대비해 비상 태세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정부가 나서서 세금을 내려야 할 때”라는 목소리도 높다.
○ “여기 기름 있어요?”
경기 의정부시의 한 주유소는 23일 경유가 똑 떨어졌다. 이 주유소 사장 김모 씨는 “기름값 원상복구를 앞두고 정유회사에서 워낙 빠듯하게 공급했기 때문”이라며 “손님들에게 ‘기름이 없다’고 말하는데 정말 속상하다”고 털어놨다. 3년째 이 주유소를 찾는 한 단골은 그에게 “주유소에 기름이 없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김 사장은 사재기 의혹에 대해서는 “주유소 저장탱크 용량이 뻔한데 가능한 일이냐. 정유사들이 애꿎은 주유소에 화살을 돌리는데 황당하다”고 말했다.
27일 같은 동네의 다른 주유소. 한 손님이 “근처 주유소에 갔는데 기름이 없다고 해 여기로 왔다. 전시(戰時)도 아니고 별 황당한 일도 다 있다”라며 혀를 찼다. 이 주유소 종업원 정모 씨는 “요즘 사재기, 공급 부족 얘기가 많이 나오니까 손님들이 먼저 ‘여긴 기름 있어요?’라고 묻곤 한다”고 말했다.
이 주유소는 ‘7월 6일까지 L당 100원 할인’이라고 적은 큰 현수막을 걸어 놨다. 정 씨는 “기름값 인하가 끝나면 왜 또 올렸냐고 화내는 고객이 있을까봐 걱정이다. 이번 조치는 주유소, 정유사, 소비자 모두 피해자다. 누구 좋으라고 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소비자단체는 일선 주유소가 L당 100원씩 인하된 공급가격을 소비자 판매가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한국주유소협회 관계자는 “카드수수료, 인건비, 세금, 관리비 등이 다 포함된 주유소 판매마진이 5∼6%에 불과하다. 여력이 있는 직영 주유소들은 100원씩 내렸지만 자영(自營) 주유소는 계산할 것이 많다”고 반박했다.
○ 정유사-주유소 신경전
기름값 인하를 계기로 주유소와 정유사는 ‘동지’에서 ‘적’이 됐다. 정유사들은 주유소의 사재기로 공급이 달린다고 주장한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평소보다 과도하게 물량을 요구하는 주유소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주유소들은 일부 주유소가 기름을 비축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돈을 벌려는 사재기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한다. 한진우 한국주유소협회장은 “주유소 간 경쟁이 극심해 100원을 다 올리면 단골손님도 다 놓친다”며 “싸게 재고를 확보해 두면 가격 인상을 완충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물량 확보에 나선 주유소들 때문에 6월 1∼15일 석유제품 수요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크게 늘었다. GS칼텍스는 휘발유가 28%, 경유가 40% 늘었고 현대오일뱅크는 휘발유 10%, 경유가 20% 증가했다. 단 카드결제 할인방식을 택한 SK이노베이션은 주유소의 제품 수요에 큰 변화가 없다.
기름값이 오르기 전 최대한 물량을 확보하려는 주유소들에 대해 정유사는 물량 제한에 나섰다. 한국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주유소 공급가 할인방식을 채택한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는 기름값 인하조치 전 평균 판매량 기준으로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한꺼번에 100원을 올리지 말고 단계적으로 인상하라는 정부의 ‘권유’에는 응하지 않을 계획이다. 그 대신 국제유가 추이, 정부의 수입관세 인하 여부 등을 주시하고 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정부가 기름값 연착륙을 위한 ‘출구전략’을 내놓지 않는 한 자체적으로 100원 환원의 충격을 완충할 길은 없다”고 말했다.
윤원철 한양대 교수는 “정유사가 손해를 보고 소비자들도 고유가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이제 정부가 유류세 인하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힐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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