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현대자동차그룹은 요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상반기 세계시장에서 320만대를 팔아 반기 기준 사상최대 실적을 올렸다. 미국시장에서 처음으로 점유율 10%를 돌파했다.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 3형제'는 시가총액을 합할 경우 1위인 삼성전자를 넘볼 수준으로 덩치가 커졌다. 정보기술(IT) 업종이 올해 들어 다소 주춤하곤 있지만 석유화학, 철강, 기계 등 대다수 수출산업들은 매일 같이 해외에서 눈부신 승전보를 보내오고 있다.
#장면2. 디자인·인쇄업체인 A문화사의 조모 사장은 요즘 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매년 10~15% 매출이 줄면서 이번 달에도 생산(재단) 파트 직원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데다 2008년 대형 제지업체가 인쇄업에 뛰어들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월간지 인쇄, 화장품 포장 등 주요 일감을 고스란히 대기업에 빼앗겼다. 조 사장은 "대기업이 진출한 이후 업계 전체 입찰가가 낮아졌다"며 "직원들을 놀릴 순 없어 손해 보더라도 싼 가격으로 입찰해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경기회복이 정보기술(IT), 자동차 등 자본집약적 수출제조업 위주로 이뤄지면서 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음지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특히 핵심 업종들의 이익 향유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 부작용이 노골화되면서,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가 더욱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그들만의 수익'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30만6000여 개 기업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14.5%, 총자산도 9.6% 증가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이 모두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뜯어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300인 이상 대기업과 수출비중 50% 이상인 수출기업의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6.5%에서 7.8%로 상승했지만 중소기업과 내수기업은 각각 -0.1%, 0.0%로 제자리걸음이었다.
중소기업은 갈수록 한계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사업체수는 많고 규모는 영세한데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의 영역까지 진출해 몸집을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만성적인 외부차입을 통해 현금흐름 악화를 보전하는 잠재 부실중소기업은 2002년 3.8%에서 2009년 7.7%로 크게 늘었다.
업종 내에서도 희비가 엇갈린다. IT제조업은 업종 전체로는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영세업체간 과당경쟁 여파로 수익이 저조한 잠재부실기업들이 많다. 중소기업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질주하다 출혈 경쟁으로 몰락한 내비게이션 업계가 대표적이다. 2008년에는 한 해에만 150여개의 업체들이 부도 또는 폐업 처리됐다. 최근까지도 내수시장은 물론 해외시장에서도 1, 2위를 다투던 '엑스로드'도 지난해 적자를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7년 된 한 중소업체 대표는 "대기업들이 진출하고 자동차 회사들이 자체 내비게이션 제작을 하는 등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며 "이대로 가다간 상위 10곳을 빼고는 다 망하거나 대기업 하청업체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만의 고용'
대표기업들이 해외에서 성과를 올리고 이익이 증가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만드는 일자리는 쥐꼬리 정도에 불과한 것이 문제다.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시중은행의 인사담당자에게 신규채용은 관심 밖의 업무가 된 지 오래다. 아직 인원이 많다는 회사의 판단 때문에 신규채용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 대신 그는 PB파트 직원들에게 매주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하는 등 교육 관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의 번듯한 일자리에서 고용의 문이 열리지 않다보니 지난달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생산직 근로자 모집에는 70명 모집에 7000여 명이 몰려 경쟁률이 사상 최고인 '100대 1'을 넘어서기도 했다. 같은 업종 안에서도 희비가 엇갈린다. 건설취업포털 건설워커에 따르면 상반기 건설업계 채용공고는 4만92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4% 감소했다. 하지만 플랜트 인력은 건설사들이 스카우트를 하며 서로 모셔가려는 상반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고용에서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등 4대 업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6.0%, 2008년 5.6%, 2009년 5.4% 등 계속 하락하고 있다. 특히 IT제조업 종사자는 2006년 42만2155명에서 2009년 37만7336명으로 4만5000명 가까이 줄었다.
일자리 창출이 제한적인 전자 등 일부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고용이 성장세에 훨씬 뒤처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2008년 기준 반도체의 취업유발계수는 5.7로 전산업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취업유발계수는 특정 산업부문 생산제품에 대한 최종수요가 10억원 발생할 경우 해당 산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에서 직간접적으로 유발되는 취업자수를 뜻한다.
●'그들만의 소비'
대기업들이 수출로 번 돈이 고용을 통해 확산되지 않으면서 소비도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명품을 찾는 고소득 중산층의 백화점 유입이 늘면서 백화점은 올해 들어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연회비가 수십만 원 하는 프리미엄 급 카드, 한번에 2400만~2900만 원씩 하는 유럽투어 상품도 매진되고 있다. 반면 주머니가 얇아진 서민들이 충동구매를 피하면서 대형마트의 매출증가율은 5월과 6월 연속으로 2%대에 그쳤다.
국내 자동차시장에서는 경차와 대형차 판매는 크게 늘었지만 소형차와 중형차 판매는 감소하거나 주춤하고 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판매차량 중 중형차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25.6%에서 올해 19.4%로 줄었다. 대신 경차(15.2%)와 대형차(18.7%)가 약진했다. 중형차 수요층 가운데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준대형차로, L당 2000원을 넘는 고유가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준중형차나 소형차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수출중심 경제가 더 이상 투자→고용→소득증대의 선순환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며 신기술 산업,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내수산업 등 대체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예전에는 수출 위주 대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 게 세계화였다면, 이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쓸 수 있게 하는 내수 산업의 세계화를 할 시점"이라며 "소비 양극화도 내수 산업 육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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