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하면 떠오르는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우리 조상의 핏값으로 지은 제철소’가 그 하나이고,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가 나머지 하나다. 6년 전쯤 작가 이대환의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을 읽다가 마음에 새겨지다시피 한 구절이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지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는 당시 박태준 사장의 비장한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2002년 글로벌기업답게 회사 이름을 포항제철에서 포스코로 바꿨지만 ‘민족기업’이라는 이미지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1988년 6월 포항제철은 서민층에 국민주를 발행해 기업을 공개한 국민주 1호 기업이 됐다. 포항제철이 품고 있는 ‘조상’ ‘핏값’ ‘민족’이라는 속성과 맥이 닿는 상장 방식이었다. 특히 ‘3년 이상 보유’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투자자들에게는 공모가(1만5000원)보다 30% 싼 주당 1만500원에 주식을 팔아 장기투자를 유도했다.
포항제철의 상장 과정은 최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우리금융지주와 대우조선해양의 주식을 국민주로 매각하자며 주장한 내용과 많이 닮았다. 포항제철 상장 때 정부는 자본시장의 저변을 넓히고 저소득층의 재산 형성을 도울 수 있다며 국민주 발행을 주도했다. 그로부터 23년 뒤인 지금 홍 대표가 밀고 있는 ‘공적자금 투입 기업의 국민주 매각’ 방안도 국민 부(富)의 증식과 저소득층의 생활지원 효과를 내세운다. 월 소득이 115만 원을 넘지 않는 저소득층 약 600만 명이 싼 가격에 우리금융 등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장기보유자에게는 세금 혜택까지 준다면 근로의식도 높아지고 재산도 불릴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도 깔려 있다. 그렇다면 포항제철의 상장 이후 과정은 애초 기대대로 전개됐을까.
포항제철은 거래 첫날 장이 열리자마자 주가가 4만3000원으로 치솟았다. 기쁨에 겨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투자자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장된 지 3년 뒤인 1991년 포항제철의 주가는 시초가의 반 토막 이하로 곤두박질했다. 개인주주 10명 중 8명이 포항제철 주식을 내던졌다. 자본시장의 저변이 넓어지기는커녕 증시에 환멸을 느낀 이만 늘어났을 법하다. 사실 개인주주 1명당 10주 정도만 배정돼 재산을 불릴 그릇 자체도 작았다.
투자의 대가들은 한결같이 ‘주식은 여유자금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돈에 쫓기지 않아야 시장과의 기약 없는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에 장기투자를 권유한들 별 소용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주 1명이 우리금융 32주, 대우조선해양 8주꼴로 받으면 살림살이에 크게 도움이 될까. 이렇게 산산이 흩어진 주식은 시간이 흐르면 외국인의 손으로 흘러들어간다. 주가가 47만 원대로 오르는 동안 외국인 지분이 50%로 급증한 포스코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서민이 등 돌리고 자본시장 문턱도 낮아지자 ‘민족기업’은 ‘외국계 기업’으로 바뀌었다. 우리금융이나 대우조선해양이 이렇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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