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워싱턴 주에선 ‘부자세(富者稅)’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었다. 11월로 예정된 중간선거에 개인소득세 관련 법안이 회부됐기 때문이다. ‘이니셔티브 1098’로 불리는 이 법안의 내용은 연소득이 20만 달러 이상이거나 부부 합산 40만 달러 이상일 때 5%, 연소득 50만 달러 이상이거나 부부 합산 100만 달러 이상일 때는 9%의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개인소득세 관련 법안이지만 상위 1%의 고소득자만 내는 ‘부자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워싱턴 주는 미국에서 소득세조차 없는 7개 주 가운데 하나다. 논쟁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당시 현지에서 연수 중이던 기자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
우선 세계 최대의 부자로 꼽히는 마이크로소프트(MS) 빌 게이츠 설립자와 그의 부친 빌 게이츠 시니어가 찬성 진영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자세를 통해 마련된 재원을 교육과 의료 시스템에 투자하는 게 장기적으로 워싱턴 주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부자들이 부자세 도입에 앞장섰다는 사실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반대 진영의 면면이었다. MS의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발머와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처럼 쟁쟁한 기업인들이 나섰다. 이들은 사재를 털어 각각 10만 달러를 반대진영 캠페인을 위해 내놓기도 했다.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물리면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워싱턴 주를 외면하게 돼 기업 환경이 악화된다고 맞섰다.
MS와 아마존닷컴은 워싱턴 주에 뿌리를 둔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MS는 시애틀 인근 레드먼드에, 아마존은 시애틀 시내에 본사가 있다. 워싱턴 주 정부는 불황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었고 개인소득세가 도입되면 연간 20억 달러의 세수를 기대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현지 기업인들이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특히 MS의 CEO인 발머는 회사의 설립자이자 최대주주인 빌 게이츠의 의사에도 정면으로 반하는 목소리를 냈다.
한국에서 기업인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할 일은 제대로 안 하면서 돈만 많이 받아가는 사람들 정도로 취급될 때가 많다. 현직 장관이 공개석상에서 “대기업들이 경영진 월급을 지나치게 많이 주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기업인들은 대체적으로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세우길 꺼린다. 사석에선 “정부가 ‘물가 안정’ 드라이브를 걸면서 제품 가격을 100원 올리는 데도 일일이 간섭을 한다” “일방적으로 기업에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등의 목소리를 내지만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지난해 워싱턴 주 기업인들이 소득세 도입을 반대한 것은 우수 인재를 확보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인재 확보가 중요하지만 어찌 보면 다소 한가한 주제다. 한국 기업인들은 하루하루 기업 환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만한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을 비롯해 공존과 상생을 위한 사회적인 해법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현안에 대한 기업인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한쪽의 침묵이 계속되면 건강한 토론은 불가능하고, 효과적인 대안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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