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코스피가 제로 되겠어” 금융시장 패닉 르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9일 18시 19분


9일 오전 11시20분. 코스피가 무려 184포인트 떨어진 시각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자산운용의 주식운용본부. "어… 어…"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더니 삽시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니터에 표시된 전 종목에 일제히 파란불이 들어와 있었다. 한참 만에 누군가 "이런 식으로 열흘만 떨어지면 코스피가 제로가 되겠어"라는 썰렁한 농담을 던졌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이 계속 됐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의 강풍을 맞아 코스피가 7일째 추락하던 날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하루 종일 비탄과 탄식의 한숨이 떠돌아다녔다. "연기금이 들어온다고 하니 1,800이야 깨지겠어." "미국이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한국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라는 게 있는데 폭락장이 오래야 가겠어." 오전 장이 열리기 전의 이같은 기대는 순식간에 무위가 됐다.

●한숨조차 새나오지 않는 주식파트 vs 주문 넣기 바쁜 채권파트

주가가 이틀 연속 장중 100포인트 넘게 떨어진 9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오전부터 대우증권 트레이딩센터와 KB자산운용의 주식운용본부를 찾아 공포와 긴장이 오가는 트레이딩 현장을 지켰다. 2일부터 8일까지 코스피는 5거래일 동안 302포인트나 떨어졌지만 신용등급 강등이후 간밤에 처음 열린 미국 증시가 5~6%대로 하락하자 이날도 공포심리에 붙잡힌 투자자들의 패닉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대우증권 2층에 자리한 트레이딩센터에는 200여명의 전문투자자들이 있다. 하지만 전문가라고 해서 대책 없는 폭락장에 뚜렷이 대응할 수 묘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장이 열리기 전에는 국제 경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내수위주의 '방어주'에 투자해 어떻게든 수익을 노려보겠다는 의욕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트레이딩 룸 한 켠에 자리한 주식 트레이더들이 들여다보던 6개의 모니터에서 오전 9시를 기점으로 각종 그래프가 모두 고꾸라지자 하나 둘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취재 때문에 트레이딩센터를 오가던 기자에게 한 트레이더는 "말도 붙이지 말고 발소리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황이었다.

오전 10시 1,977선으로 떨어진 코스피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 상급자가 "이후의 대응방안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한 직원은 "뭐 사실상 방법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파생상품 트레이더는 "어제는 그래도 장 초반엔 버텨줬는데 이건 열리자마다 마구 빠지면서 감당이 안된다"고 털어놓았다. 일부 트레이더들은 모니터를 바라보다 다 포기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점심이나 먹자"며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공포에 짓눌린 주식파트와 달리 건너편에 자리한 채권파트는 활기를 띄었다. "10-3(국고채 10년물 3회차라는 뜻) 팔아주세요." "팔아달라는데 브로커야." "기관인데 사자야, 사자."

코스피가 1,800을 지나 1,700까지 차례로 뚫고 아래로 내려갔지만 채권담당 트레이더들은 하루 종일 "판다" "산다" "호가를 불러라" 등을 큰소리로 외쳤다. 주식가격이 빠질수록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으로 인식된 채권에 수요가 몰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다행이 외국인들이 주식은 팔아치우지만 채권을 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국고채 가격은 9일 상승세(금리는 하락)를 보였다. 한 채권담당 직원은 "주식상황이 너무 어려운 만큼 이럴 때일수록 채권이라도 잘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1,680선까지 떨어졌던 주가가 오후 들어 1,800대를 회복해도 채권담당 직원들의 모니터에는 매수나 매도주문을 알리는 메신저가 수시로 깜빡깜빡 켜졌다.

●밑 빠진 증시 구원투수는 어디에…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전날 점심시간에 폭탄이 터지듯 주가가 자유낙하 했던 상황과 달리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주가는 상승반전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김밥, 떡볶이, 샌드위치를 사 두고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던 KB자산운용본부에서는 오후 1시10분을 지나면서 코스피가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자 샌드위치를 집어 드는 손길이 한두 명씩 늘었다. 오전 중 3000억 원대 순매수하던 연기금이 4000억 원, 5000억 원으로 지속적으로 증시매입 자금을 늘리는 게 확인됐다. 2시 무렵 코스피가 1,800선을 넘어서자 그제야 펀드매니저끼리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KT&G 주가가 소폭 오른 것에 대해 "시장이 폭락하니 담배 피우는 사람들 많아져서 KT&G주가만 오르는 거 아니냐"는 농담도 오갔다. 매니저들은 "우리 애들(보유한 주식을 지칭) 밥 좀 주자"며 투자하는 업종, 섹터별 추가매수 종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장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송성엽 주식운용본부장은 "머리가 아파 죽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는 예리한 의사결정을 하기가 참 힘들다"며 "회의를 해도 딱히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에 서로 한숨만 쉬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가 보는 관건은 이날 밤 미국 상황이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내놓을 미국의 대처법과 미국 증시의 소화력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증시가 10일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송 본부장은 "만약 여기서 더 떨어진다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매니저는 "지난 일주일이 일년 같다"고 긴 한숨을 쉬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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