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협력업체인 제일정밀의 꾸준한 품질 개선 노력에 한화는 무이자 자금지원, 납품대금 현금 결제 등의 방식으로 화답했다. 19일 인천 남동공단 제일정밀 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 뇌관 케이스 등을 살펴보고 있는 김흥곤 대표(가운데)와 직원들. 인천=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이런 현실
경기 시화공단에서 자동차 및 전자부품업체를 운영하는 1차 협력업체 A사 관계자는 “물건을 만들어 팔아도 현금을 손에 쥘 수 없으니 당장 매월 월급날이 되면 엄청나게 힘들다”며 “직원들의 월급을 안 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수수료를 떼이더라도 어음을 현금화해 월급을 지급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같은 중소기업 입장에서 현금 유동성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2, 3차 협력업체에는 어음 대신에 현금을 주고 싶지만 당장 우리 수중에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어음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품을 납품하고도 그 대금을 받기까지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어음은 중소기업 경영난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 기업의 자금사정이 쪼들리면서 어음 발행이 더 늘어났다”며 “3개월짜리가 일반적이었는데 지난해부터는 6개월짜리 어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최근 어음의 폐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대기업들이 현금결제에 크게 신경 쓰고 있는 추세지만 변칙적으로 현금결제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한국콘크리트공업협동조합연합회의 김경식 회장은 “정부와 언론에서 어음 문제를 계속 지적하니 어처구니없는 ‘무늬만 현금결제’가 판을 치고 있다”고 말했다. 납품대금을 현금으로 지급하되 2, 3개월 뒤에 몰아서 현금으로 정산하는 식이다. 김 회장은 “한 달간 납품한 금액을 다음 달에 총괄 정산한 다음, 그 다음 달에 통장으로 현금을 넣어준다”며 “결국 제품 납품 뒤에 2개월이 지나서야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음을 받으면 급한 대로 할인료를 제하고 현금 융통이라도 가능했는데, 새로운 방식은 그마저도 불가능하니 차라리 어음만 못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B사 관계자는 “현금결제를 도입했다고는 하는데 6월에 납품한 제품의 대금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며 “제대로 된 현금결제가 되려면 최소 월 단위로 납품 대금을 정산해 월말에 현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이런 대안-현금결제에 무이자 대출… 한화-제일정밀 20년 상생 ▼
“매월 말이 되면 협력업체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전화가 없어졌으니 일하기 편해졌죠.”
어음결제에서 현금결제로 바뀐 뒤 달라진 점을 묻자 제일정밀의 경리담당 여직원은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어음으로 납품 대금을 받았을 때는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이 없어 월말이 되면 2, 3차 협력사들로부터 “빨리 납품대금을 결제해 달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이 회사의 김흥곤 사장(54)은 “2, 3차 협력사들도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하니 결제를 요구했던 것”이라며 “지난해부터 현금결제를 실시하니 이 같은 전화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현금결제가 확산되면서 생긴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다.
○ 한 달에 두 번 현금결제로 이익 봐
인천 남동구 논현동 남동공단에 있는 제일정밀은 다이너마이트 뇌관 케이스를 만드는 업체다. 1988년부터 한화에 납품을 시작해 지금까지 20년 넘게 거래를 이어오고 있다. 연간 매출은 70억 원가량인데 이 중 40억 원이 한화와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매출이다.
납품대금을 3개월 만기 어음으로 주고받았던 한화의 1차 협력업체 제일정밀의 거래 방식은 지난해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0년 제일정밀이 한화에서 ‘최우수 협력사’로 선정되면서 전액 현금결제로 바뀐 것. 한화는 2009년부터 자체 선정한 최우수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전액 현금결제를 실시했고, 올해부터는 그 규모를 40개사로 확대했다. 김 사장은 “공단 내 다른 중소기업과 비교해보면 5, 6개월짜리 어음이 빈번한 상황에서 3개월짜리 어음은 그나마 양반이었는데 그래도 어려움이 많았다”며 “현금결제가 도입돼 자금 흐름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덜었다”고 말했다.
한화의 현금결제 특징은 다른 대기업과 달리 매달 15일과 말일 등 2차례에 걸쳐 현금결제를 해준다는 점이다. 15일 단위로 현금이 유입되니 중소기업 시각에서는 현금 유동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납품 단가는 그대로 유지한 채 현금결제를 도입했을 뿐인데, 제일정밀은 상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 우선 금융권을 통해 어음을 현금화할 때 드는 할인료로 인한 손해가 사라졌다. 통상 대기업이 발행한 어음은 3∼5%의 할인료가 든다. 또 시설 투자 등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주는 대출 금리가 낮아졌다. 김 사장은 “한화로부터 월 2회 현금결제가 이뤄져 현금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은행에서도 안다”며 “이로 인해 대출 금리가 과거와 비교해 2∼3%포인트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금결제에 따른 부가 혜택을 금액으로 환산해 보면 연간 1억 원은 훨씬 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소기업들이 한목소리로 현금결제 확산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제일정밀이 얻은 것과 같은 이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제일정밀의 협력업체들도 자연스럽게 혜택을 봤다. 김 사장은 “어음 대신에 현금을 받게 되니 협력업체들에도 자연스럽게 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며 “그래서 월말이 되면 협력업체들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 무이자로 자금 지원도
다이너마이트 뇌관 케이스를 만드는 곳은 국내에서 제일정밀밖에 없다. 제일정밀이 지금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최고의 품질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한화 관계자는 “회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제품을 생산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거래업체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며 “이 점이 20년 넘게 협력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제일정밀의 높은 품질에는 한화의 지원도 한몫했다. 한화는 2000년 이후 총 10억 원가량의 시설자금을 무이자로 제일정밀에 빌려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합심하는 이상적인 구조를 만든 것이다. 김 사장은 “이 자금으로 초음파세척기 등 고가의 장비를 구입하고, 공장을 남동공단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며 “또 최근에는 다이너마이트 뇌관 길이를 늘리는 설비를 구축하기 위해 1억5000만 원을 지원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화는 “주요 협력사들로부터 원·부자재 비축 비용, 시설투자 비용 등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심사를 통해 무이자로 자금을 지원해준다”며 “협력업체와 함께 성장해야만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선순환 구조 정착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에 있는 삼진정공은 자동차용 볼트, 너트 등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다. 주거래 고객인 현대자동차그룹은 2005년부터 이 회사에 거래 대금을 전액 현금 결제하기 시작했다. 삼진정공 역시 협력사들에 똑같이 현금으로 결제해주고 있다. ‘자금 선순환’의 구조가 자리 잡은 것이다. 어진선 삼진정공 대표는 “월말에 내부 집계 및 정산 등을 거친 뒤 보름가량이 지나면 거래 대금이 입금된다”며 “현금결제가 도입되고 나서부터는 자금 부담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삼진정공 같은 1차 협력업체에 100% 현금결제를 실시하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은 이 같은 거래 방식을 2차 협력업체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앞으로는 2차 협력업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라며 “1, 2차 협력업체 사이에 동반성장 관련 정책이나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마련하고, 주요 원자재를 대량 구매해 협력업체에 공급하는 ‘원자재 사급(賜給)’ 규모를 1조3850억 원으로 확대해 더욱 많은 협력업체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 상생위원회 평가- 정부, 세제혜택 통해 ‘어음 추방’ 정책적 유도를 ▼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에 제품 값을 어음으로 결제해주는 것은 서구에는 드문 한국만의 관행이다. 이율이 높아 기업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과거에 기업들은 돈을 돌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동아일보와 중소기업중앙회가 구성한 ‘대-중소기업 상생위원회’ 위원인 주현 산업연구원 중소·벤처기업연구실장(사진)은 “기업 대출이자가 연 5%대로 내려가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구시대적인 결제 관행을 유지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주 위원은 다수의 대기업이 이제는 충분히 현금결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실제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이 어음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어음결제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2000년대 들어 기업들이 어음 대신 ‘현금성 결제’를 해줄 것을 독려해왔다. 어음 대신에 현금성 결제를 하는 기업에 세제혜택을 주기도 했다. 현금성 결제는 기업구매전용카드,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 등을 이용해 결제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주 위원은 “이제는 현금성 결제가 아닌 현금결제로 가야 한다”며 “정부가 현금성 결제에 대한 인센티브를 줬듯이 현금결제를 정책적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금성 결제는 대출에 대한 이자도 모두 중소기업이 내야 하는 등 중소기업이 여러모로 불리하다. ■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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