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상훈]‘PC 제국’ HP 붕괴 부른 내부의 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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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김상훈 산업부
김상훈 산업부
영원할 것 같던 로마제국도 결국 망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지배층의 부패, 외부 세력에 대한 의존, 위기에 눈감는 착각. HP가 PC 사업을 접기로 했다. 로마가 떠올랐다.

올해 2월의 일이다. HP는 신제품 ‘터치패드’를 발표한다며 세계를 돌며 제품 발표회를 가졌다. 미국에서 1차 발표회를 연 뒤 스페인을 거쳐 중국으로 왔다. 기자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3차 행사에 초청받았다. 하지만 발표 내용은 1, 2, 3차가 모두 동일했다. 실시간으로 바다 건너 속보를 접하는 인터넷 시대라 기자들은 “다 아는 얘기다, 다른 얘기는 없느냐”고 거듭 질문했다. 하지만 쇼는 대답 없이 계속됐다.

저녁에 이런 일이 벌어진 비밀이 풀렸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상하이 푸둥 지구의 101층짜리 상하이국제무역센터 빌딩 전망대를 HP가 전세 냈다. 중국의 인기 가수도 초청했다. 그리고 ‘디너파티’를 열었다. 기자들을 위한 행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시아 전역에서 온 수백 명의 기자는 줄을 서서 배급 받듯 식사를 탄 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대충 식사를 때웠다. 그 옆에는 전망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30명 남짓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입장하자 직원들이 접시에 담긴 코스요리를 칵테일과 함께 날랐다. 로마 귀족 같은 그들이 바로 HP 임원들이었다.

이런 생활을 유지해 줄 신무기가 터치패드였다. HP가 2010년 인수한 팜이 만든 제품이다. 하지만 터치패드에 대해 HP 사람들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질문을 던지면 “그건 팜 사람들이 개발한 거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HP의 운명을 좌우할 신제품은 “독립적 운영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기존 팜 사람들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HP는 나라 경비를 게르만 용병에게 맡긴 로마제국이었다. 터치패드가 마침내 시장에 나왔을 때, 세상은 애플의 ‘아이패드2’가 휩쓸고 있었다.

위기에도 눈을 감았다. HP의 수석디자이너는 자신이 디자인한 노트북PC가 최고라며 “얇고, 가볍고, 디자인이 좋다”고 했다. 한 기자가 애플 ‘맥북에어’ 노트북을 보여주며 “당신 눈에는 이게 더 얇고, 가볍고, 디자인도 좋아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디자이너는 “우리 제품이 더 좋다”고만 답했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만져 보니 맥북에어가 더 얇고 가벼웠다.

지금 한국의 전자업계는 어떨까.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위기’를 강조한다. 부패도 단속한다. 하지만 더 긴장했으면 좋겠다. 세계 최대의 PC업체가 한순간에 사업을 접는 세상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이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싶다.

김상훈 산업부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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