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의 서울 강북 영업점에서 대출 상담을 하는 김모 대리는 지난주 본점에서 가계대출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금융당국이 가계부채를 줄이려 대출이 많은 은행을 중심으로 여신규모를 줄이라고 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이달 중순 대출을 신청하려는 고객에게 김 대리는 “금융감독원 지시 때문에 당분간 대출접수가 안 된다”고 했다. 이 고객은 금감원에 전화를 걸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했느냐”고 따졌다. 일선에서 고객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말이 금감원 고위 임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금감원 임원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금감원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정은 이렇다. 한국의 금융감독체계는 정부 부처인 금융위원회와 반민반관 기구인 금감원으로 이원화돼 있다. 평상시 금융위는 정책을 수립하고 금감원은 이 정책을 토대로 은행을 감독한다. 이번에 금융위가 은행을 대상으로 직접 정책 집행에 나선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시중은행 부행장들을 모아놓고 “가계대출이 너무 많으니 연간 대출 증가율이 7.3%가 넘지 않게 하라. 또 이 7.3%를 12개월로 나누면 0.6% 정도 된다는 점을 참고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A은행 부행장의 뇌리에는 0.6%라는 숫자만 강렬하게 새겨졌다. 부행장은 8월 가계대출 증가율이 0.6%가 넘지 않도록 하라고 영업점에 지시했다. 이미 대출증가율이 0.6%에 근접했거나 이 선을 넘은 영업점으로선 신규 대출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권도 들고일어났다. 18일 오후 국회 정무위원회의 법률안 심사에서 여야 의원들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권혁세 금감원장은 ‘금감원이 대출을 중단시킬 이유가 없다, 은행들이 오해한 것 같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대출을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직접 지시한 적이 없으니 잘못이 없고, 금융위는 증거가 없으니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는 취지로 들린다. 은행 부행장들도 심사 기준을 강화했을 뿐 대출 중단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금융위, 금감원, 은행 중 어디에도 ‘소비자의 권리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자성은 없었다. 금융감독체계 개편이나 급여인상처럼 자신들의 이익에 영향을 주는 문제에는 각종 통계와 보고서를 들이대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소비자가 대출을 받기 힘들어지는 사태쯤은 사소해 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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