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사들이고, 한국은 팔고….’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과 유럽발 재정위기로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이 이어지는 동안 일본과 한국이 외환시장에서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본은 초(超)엔고를 저지하기 위해 이달 초 4조5000억 엔을 투입해 달러를 사들인 데 이어 추가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태세다. 반면에 한국 외환당국은 원화가치 방어를 위해 달러 매도를 통한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두 나라는 수출 의존도가 큰 개방형 경제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런데도 환율과 관련한 위기대응에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일본의 경제 ‘자동안정화장치’가 고장 났다고 우려한다. 일본은 이미 경제정책의 오른손과 왼손인 재정·통화정책을 쓸 수 없는 상태다. 국내총생산(GDP)의 2배를 넘는 국가부채와 1990년대 이후 지속돼 온 일본은행의 제로금리 및 양적완화 정책으로 정부가 추가로 동원할 수 있는 정책도구가 바닥났다. 기댈 언덕은 위기 때마다 자동으로 작동해야 하는 환율 메커니즘이다. 세계경제 침체 우려로 엔화가치가 떨어지면 일본 수출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이를 통해 경상수지 흑자와 위기 탈출이 가능해지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일본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동안정화장치가 고장 나다 못해 거꾸로 작동하고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글로벌 자금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엔화로 몰려 엔화 값이 뛰고 있다. 전 세계가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추면서 과거 제로금리였던 엔화를 빌려 해외에 투자하던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청산에도 가속도가 붙어 엔화 절상을 부추기고 있다. 급기야 엔-달러 환율은 19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장중 한때 달러당 75.95엔을 나타내며 전후(戰後) 최고치인 76.25엔을 경신했다.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생산과 수출이 타격을 받아 2분기 GDP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0.3% 감소하는 등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온 일본으로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인 형국이다.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 설문조사 결과 일본 100개 기업 경영자의 40%는 “현재 환율 수준이 계속되면 신흥국에서 현지 생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응답해 일본의 앞날을 어둡게 했다.
한국은 반대로 자동안정화장치가 너무 민감한 게 탈이다. 급격한 환율 조정 기능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되기도 했지만 주기적으로 외환위기설을 불러오는 주범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가 이번 위기 때 원화가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달러를 시장에 푸는 미세조정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 대규모 매도에 나선 가운데 채권시장마저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의 매도 움직임이 가시화하면 걷잡을 수 없는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환시장의 쏠림 현상을 막아 적어도 채권시장은 지키겠다는 정책 당국의 전략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외국인이 주식을 대거 매도하던 8월 초 “이 정도 규모면 2008년 같으면 하루에 40∼50원씩 원화가치가 떨어졌을 것(환율은 상승)”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8월 들어 일일 환율 변동 폭은 종가 기준으로 20원 이내 수준에 그치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자동안정화장치가 한국 경제의 취약한 위기 대응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위기에도 바람을 덜 타는 경제를 구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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