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부터 주말마다 삼성전자가 만든 구글 ‘크롬북’을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크롬북은 구글이 기획하고 삼성전자가 제조를 맡은 새로운 개념의 노트북입니다.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구글 I/O’라는 행사에서 공개됐는데 여러 혁신적인 기능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구글이 자랑했던 크롬북의 혁신적인 기능이란 이런 겁니다. 첫째, 8초 이내에 부팅됩니다. 윈도 운영체제(OS)를 쓰는 일반 노트북은 부팅에 1분도 넘게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모든 데이터를 구글의 클라우드에 저장합니다. 일반 노트북은 대개 하드디스크에 정보를 저장하지만 크롬북은 그 대신 구글의 온라인 저장공간에 내 문서를 업로드해 놓습니다. 따라서 남의 크롬북을 써도 자신의 구글 계정만 있으면 마치 내 컴퓨터를 그대로 쓰는 것처럼 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한 대의 크롬북을 가족들이 자신의 컴퓨터처럼 번갈아 쓰는 것도 가능합니다. 셋째, 크롬북은 점점 성능이 떨어지는 다른 노트북과는 달리 쓰면 쓸수록 성능이 향상됩니다. 구글이 크롬북의 OS인 크롬OS를 계속 업그레이드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크롬북은 하드웨어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외관은 간결하고 고급스러웠으며 키보드는 타자를 칠 때마다 좋은 느낌으로 튀어나왔고, 화면은 밝고 선명합니다. 배터리도 8시간 이상 갑니다. 외부에 나갈 때 충전 케이블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1.66GHz(기가헤르츠) 속도의 듀얼코어 프로세서와 2GB(기가바이트) 메모리는 제가 2년 전 쓰던 업무용 노트북 수준이었습니다. 20만∼30만 원의 싸구려 ‘넷북’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죠.
그런데 이 훌륭한 하드웨어로 크롬북이 하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웹브라우저 열기. 크롬북에는 다른 기능이 없습니다. 일반 노트북에서 크롬 웹브라우저를 설치한 뒤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크롬북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더 황당한 건 이 웹브라우징 능력입니다. 조금만 복잡한 플래시 프로그램(페이스북용 게임 등)을 돌리면 곧바로 컴퓨터가 헤매기 시작합니다. 프로세서와 메모리의 성능을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게다가 저는 긴 글을 다듬는 작업을 크롬에서 할 생각이었는데, 100페이지 정도가 넘어가는 문서를 복사하고 편집하려면 ‘붙여넣기’ 버튼을 누른 뒤 30초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든 걸 구글 서비스 내에서 해결하면 문제는 그나마 최소화됩니다. 이미지 편집을 피크닉(구글의 클라우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하고, 문서 작성은 구글 문서도구에서만 하며, 게임도 크롬OS용 앵그리버드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상황은 구글이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비판하는 바로 그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비유하자면 구글은 지금 크롬북 프로젝트를 위해 포르셰(삼성전자 하드웨어)를 사다가 마티즈용 타이어(크롬OS)를 끼운 뒤 시내주행(웹브라우징)만 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다행인 건 타이어가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고, 시내 도로 환경도 운전자 친화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행한 것은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현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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