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진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적 경제주체이기도 하지만 자금의 순환을 매개하는 중재자로서 경제 전반에 영향을 주는 인프라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위기는 개별 금융회사의 어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반의 교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는 약세장은 대부분 은행의 위기와 함께 나타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코스피가 54% 급락했던 것도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신용경색이 한국에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은행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은 유럽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재정 부실 국가들이 발행한 국채를 보유한 유럽 금융회사들이 유동성 위험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난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 등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이 유럽 민간은행들에 대한 유동성 지원에 나서기로 한 것은 적절한 처방이었다고 본다. 리먼을 파산시킨 후 글로벌 경제는 너무도 큰 비용을 치렀다. 거대 금융회사의 파산은 심각한 신용경색으로 이어졌고 이는 실물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오히려 리먼에 구제금융을 지급해 파산을 막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리스 지원에 대한 유럽의 결의가 지연되고 있음에도 서구 증시가 반등세를 나타내는 것도 중앙은행이 최소한 은행 파산만큼은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줘야 한다. 현재 유럽 은행업종지수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6배에 불과하다. 은행의 주가가 자신이 가진 자산가치의 60%에 불과한 것이다. 부도 때 나눠 가질 자산보다 주가가 낮게 형성돼 있다는 말은 투자자들이 기업의 재무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투자자들은 유럽 은행들의 대차대조표가 재정 부실 국가들의 국채 투자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시장이 예상하고 있는 은행의 자본 손실을 누군가는 채워줘야 한다. 충분한 자본을 가지고 있어야 대출, 보증 같은 은행 본연의 활동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은행의 자본 확충에 도움을 주는 것은 정부였다. 은행의 공적인 성격 때문에 정부 지원은 정당화될 수 있었다. 1998년 한국 외환위기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고 리먼 파산 직후 미국 은행들의 자본 확충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문제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할 유럽 주요국 정부의 재정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당장은 주가가 회복되고 있지만 유럽의 은행위기는 금융회사 자본 확충과 관련한 청사진이 나와야 어느 정도 해결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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