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한국전력공사 중앙교육원 배전실습장.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의 실습생 24명이 오전부터 실습에 한창이다. 8m 높이의 실습용 전신주에 오른 학생들은 지도 교사의 지시에 맞춰 완철(전신주 꼭대기에 가로로 놓여 전깃줄을 고정하는 쇠막대기)을 전신주에 설치하는 실습을 하면서 연신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10kg이 넘는 쇳덩이를 8m 높이의 허공에서 다루려니 어느새 작업복은 땀에 푹 젖었다. 실습 지도를 맡은 신인철 교사(45)의 눈매가 매섭다. "이건 연습에 불과해. 실전에선 태풍 부는 날에 20m 전신주 위에서 5만 볼트 고압선을 다뤄야 한다고."
24명의 실습생들은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서울 수도전기공업고 3학년 학생들이다. 지난달 한전 특채로 뽑힌 이들은 12월 2일까지 계속되는 14주짜리 교육을 마치면 곧바로 기능직 정규사원에 임명된다. 실습생 최 선(18) 군은 "대학에 대한 낭만을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대학 나와도 한전 같은 곳에 취업할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며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친구들도 부러워해, 가능하면 앞으로 오래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공공기관 고졸 취업문, 열리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 있을 줄로만 알았던 공공기관의 고졸 취업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공공기관의 고졸 취업률이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본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고, 이명박 대통령이 7월 "공직사회와 공기업에서도 고졸자 취업이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공공기관들과 금융회사들이 앞다퉈 고졸 채용에 나서고 있다. 불과 두 달 사이, 각 기관의 현장과 학교의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수도공고생 24명을 특채로 뽑은 한전은 12년 만에 고졸 예정자에게 문호를 열었다. 과거에는 주로 고용노동부가 보조하는 직업훈련원에서 기능직을 충원해 왔다. 한전교육원 윤상천 배전교육팀장은 "학교에서 이론을 잘 배워서인지 가르치면 금방 금방 이해하고 있다"면서도 "전신주에 올라가려면 덩치가 크고 힘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어린 것 같아 조마조마하기는 하다"고 웃었다.
IBK기업은행 서울대역지점 김소나(18) 계장은 7월부터 이 곳에서 일하고 있다. 서울여상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이지만 학교에서 증권투자상담, 재경관리 등 재무관련 과목을 꼼꼼히 배운 준비된 '은행원'이다. 기업은행에서 김 계장은 벌써 유명인사다. 입사하자마자 고졸 신입사원 격려차 본점을 방문한 이 대통령과 악수를 나눴고, 여러 언론에 '15년 만의 고졸 행원'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다뤄졌다. 김 계장은 "차별받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고, 어느 정도 차별을 감수하겠다고, 상처받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기우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김원중 부지점장은 "선배들한테 싹싹하게 잘하고 무엇보다 고객에게 늘 웃는 표정으로 응대해 인기가 좋다"며 "일 잘하는 젊은 친구는 학력과 상관없이 언제나 대환영"이라고 했다.
고졸 취업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는 '경력 고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롯데마트 서울역점 농산물코너에서 근무 중인 백승호(27)씨가 그런 케이스다. 백 씨는 2004년 여수 한영고 졸업 후 대학을 1년 다니다 아버지 병환으로 군 제대 후 자퇴했다. 고졸 신분으로 2007년부터 롯데마트 강변점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다가 최근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백 씨는 "친구들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있는데 취업이 잘 풀리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며 "나 같은 사람이 일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면 더 많은 고졸에게 기회가 열릴 것 같다"고 말했다.
●"없어서 못 보내요"-일부에선 거품 우려도
전문계고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서울여상이 대표적이다. 이 학교 김시택 취업지도부장은 "그간 취업이 잘 된다고 해도 40% 정도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는데, 올 1학년생은 80%가 취업을 희망했다"고 전했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고졸 취업 성공사례를 다루면서 전문계고 아이들이 취업에서 희망을 얻었다는 것이다. 내년 2월 삼성SDS 입사 예정인 서울여상 3학년 이은영(18) 양은 "처음에는 대학진학이 목표였지만 3학년이 되면서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며 "올 들어 채용 기회가 부쩍 늘어 학교 친구들과 후배들이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 양과 같은 반 급우 25명 중 절반은 이미 직장에 다니고 있고, 나머지 절반도 발령대기이거나 전형이 진행 중이다.
고졸채용이 확대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일시적 유행에 그칠 수 있다며 '고졸채용 거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일부 공공기관들이 갑자기 고졸 채용을 늘리다 보니 급조된 채용이 많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계고 취업지도 교사는 "지난 10년간 한 번도 취업의뢰를 하지 않던 공공기관들이 애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사례가 늘었다"며 "정말 필요해서 요청하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공공기관들은 대개 성적 상위 4~5% 이내 학생들을 원하는데, 이 정도 상위권 학생은 1학기 초에 일찌감치 대기업, 증권사 등이 입도선매한다. 전문계고에서 신입사원을 뽑아본 적이 없는 공공기관들은 "일단 원서라도 제출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뒤 눈높이에 맞지 않는 학생들이 응시하면 "역시 쓸 만한 애들이 없다"며 고졸 채용을 포기하는 악순환이 나타날 것이란 우려가 그래서 나오고 있다.
시류에 따라 고졸 채용이 늘어나다 보니 분위기가 바뀌면 언제라도 채용 요청이 감소할 것이라는 걱정이 많다. 업무를 정확히 지정하지 않은 채 '일반사무직'이라고만 통칭해 취업의뢰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그 회사에 가면 무슨 일을 할지를 설명하기 곤란한 때가 많아 추천을 해 줘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공업계고 취업교사는 "거품이 꺼지면 올해, 내년 취업한 아이들은 로또에 당첨된 식으로 취업했다는 얘기를 듣게 될 것"이라며 "어린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실망을 안겨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오성삼 건국대 교수(교육공학)는 "고졸 채용 확대 노력이 현 정권의 이벤트로 끝나선 안 되고, 제도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후속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기업들도 직무분석을 통해 고졸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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