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s No.1 LCD Company.’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 3단지에 있는 LG디스플레이 생산공장 건물에 붙어 있는 슬로건이다. 자신감 넘치는 슬로건이지만 최근 단지 곳곳에서는 침울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5일 구미공단에서 만난 협력업체 관계자들은 LG디스플레이의 ‘추석연휴 휴무 쇼크’로 지역사회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전했다. LG디스플레이 구미공장은 1995년 문을 연 이래 추석연휴로는 지난달 처음 생산라인을 세우고 직원들에게 일주일 휴가를 줬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엄습하던 2008년 추석 때도 24시간 풀가동했던 공장이 ‘우울한 휴가’에 들어간 것은 올 들어 액정표시장치(LCD) 수출이 미국과 유럽의 재정위기 여파, 중국의 경기둔화로 감소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LCD와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발광다이오드(LED) 모니터를 포함한 평판 디스플레이 수출은 올해 1∼8월 197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213억 달러)보다 7.5% 감소했다.
구미공단에서 LCD TV 부품을 생산해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납품하는 한 중소업체 이사는 “LCD 시장이 침체되면서 LG와 삼성의 공장가동률이 60∼75%대로 떨어졌다”며 “수출 의존도가 80%에 이르는 회사들인데, 당분간 회복이 쉽지 않아 보여 걱정”이라고 말했다. LG전자의 한 협력업체 상무는 “아직 감원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연장근무가 없어지면서 근로자 급여도 줄었다”고 전했다.
평판 디스플레이뿐만이 아니다. 반도체와 가전제품, 영상기기 등 전자·정보기술(IT) 산업 전체가 하향곡선이다. 전자·전기 제품은 지난해 유럽 수출이 전년 대비 13% 성장했지만, 올 들어선 8월까지 14.9%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수출이 18.9% 줄어든 2009년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성장세가 꺾이지 않던 대(對)중국 수출은 올 들어 1∼8월 고작 3.1% 늘어나는 데 그쳤다.
유럽발 재정위기에 강한 내성을 보여 왔던 한국 경제가 그동안 버팀목이 돼 왔던 중국 경제가 흔들리면서 글로벌 실물경기 침체의 수렁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출이 둔화하면서 실물경기 3대 지표인 생산과 소비, 투자가 8월을 기점으로 모두 하향세로 돌아섰다.
수출은 올 4월에 484억30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정점에 섰다가 이후 하향세로 돌아섰다. 8월 경상수지는 4억 달러 흑자로 전달인 7월 흑자액(37억7000만 달러)의 9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특히 한국 경제의 마지막 구원투수인 중국 수출 증가세는 5월을 기점으로 급감해 5∼8월 수출 증가율이 20.4%로, 지난해 같은 기간(41.2%)의 절반에 그쳤다. 한국의 중국 수출 의존도는 30% 수준으로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전체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 中 바이어 발길 뚝, 대기업 주문도 뚝… ▼ “일없이 출근… 직장 잃게될까 두렵다”
5일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 TV 부품을 생산하는 한 공장의 생산라인 모습. 이 업체는 경기침체로 액정표시장치(LCD)의 대기업 납품 물량이 올해 초에 비해 절반으로 줄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미=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산업현장의 체감 위기는 심각하다. 한국 경제의 7대 주력 수출업종 가운데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수출은 2, 3월을 기점으로 이미 하락세로 돌아섰다.
위기 징후는 지난해와 올 초까지 중국 특수를 누리던 일반기계와 석유화학 제품은 물론이고 조선과 자동차로도 확산되고 있다.
○ 일감 준 남동공단…텅 빈 작업장 속출
6일 오후 4시경 기계와 화학섬유 공장이 밀집한 인천 남동구 고잔동 남동국가산업단지. 한창 바빠야 할 시간인데도 자동차 기계설비 제작 공장에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 직원 2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10여 명의 직원은 무료한 표정으로 공장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한 30대 직원은 “몇 달 전부터 일감이 빠르게 줄었다”며 “출근을 해도 할 일이 없어 시간만 때우다 보니 아예 직장을 잃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공작기계류를 수출하는 산업기계업체의 사장은 2008년 금융위기 때와 같은 침체를 겪을까 봐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흑자는 꿈도 못 꾸고 적자폭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라며 “8월부터 공장가동률이 70%로 떨어졌다”고 했다. LG, 삼성 등 대기업이 올해 설비투자 계획을 뒤로 미루면서 주문량이 급감했다는 설명이다.
기계류 공장들은 지난해 중국 수출이 월평균 50% 이상 증가하면서 보기 드문 호황을 누렸지만 최근에는 중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뚝 끊겨 울상이다. 중국에 산업용 전자계측기를 수출하고 있는 한 업체는 올해 중국 수출 물량이 지난해의 절반으로 반 토막 났다. 이 회사 해외마케팅 담당 부장은 “지난해부터 중국 수출 물량이 늘면서 회사 사정이 빠르게 좋아졌지만 올해는 중국 쪽 주문이 줄어 회복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기 둔화는 일부 제품의 원료 확보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가전업체는 냉장고 단열재 원료를 구하지 못해 이달 말부터 생산라인 일부가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냉장고 단열재 원료는 자동차 시트 등의 원료로 쓰이는 톨루엔 디이소시아네이트(TDI)라는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 국내에서는 화인케미컬 등 3개사가 연간 36만 t을 생산해 중국에 90% 이상 수출해 왔는데, 최근 대중국 수출이 줄자 잇달아 생산라인을 세우고 있다. 이 바람에 냉장고 단열재 원료 수급도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경기 부진의 먹구름은 한국 조선산업의 메카인 경남 거제시 앞바다에도 몰려들고 있었다. 7일 방문한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독과 야드는 선박을 조립 중인 크레인의 부산한 움직임으로 활력이 넘치는 듯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올해 상반기 회복세를 보이던 글로벌 선박 발주 물량이 다시 떨어지고 있는 데다 저가(低價) 수주경쟁으로 제값을 받는 것도 어렵다. 선박 가격은 2008년에 비해 10∼30% 떨어진 상태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조선사들은 오랜만에 ‘해뜰 날’을 기대했다. 삼성중공업도 올해 수주목표 115억 달러를 일찌감치 초과달성했다. 하지만 유럽발 재정위기로 경기불안이 본격화된 9월부터는 한 건도 수주를 못 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그리스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의 선사가 발주처의 60%”라며 “계약하고 2, 3년 후 선박을 건조하는 점을 감안하면 2015년 이후 건조 물량이 없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다른 업체에서는 선주들이 계약 체결을 연기하거나 파기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수익성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초저가로 수주한 선박들이 올해 하반기부터 건조돼 재무제표에 본격 반영되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 이정호 경영관리팀 전문위원은 “내년 이후 영업이익률이 1∼2%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실물경제 위기 이제부터 시작
전문가들은 수출 감소에 따른 실물경제의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위기의 진원지인 유럽이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데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중국마저 감속성장에 들어간 탓이다. 당장 내년부터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이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도 일각에서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실물경기 침체의 영향이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만큼 연말로 갈수록 한국의 피해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리스 재정위기가 주변국으로 확대될 경우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은 0.5%포인트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 하락하면 한국의 수출은 1.5%포인트 줄어든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선진국 경기침체가 중국을 거쳐 신흥국으로 파급되면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2008년과 달리 고물가에 시달리는 중국이 경기부양에 나서기도 어려워 충격이 오래갈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구미·인천=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거제=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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