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24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펼쳐진 대학가요제의 화려한 조명이 무대 위 여섯 청년을 비추고 있었다. 신해철과 015B라는, 1990년대 가요계 스타를 탄생시킨 그룹 ‘무한궤도’였다.
그날의 주인공 ‘무한궤도’ 드러머 조현찬 씨(44)가 23년 만에 대학생 200여 명 앞에 섰다. 21일 기획재정부·외교통상부 주최 국제기구 채용 설명회가 열린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우당교양관. 눈부신 조명 대신 파워포인트 화면이 비추는 강단 위에서 ‘국제금융기구 진출 경험기’ 강연에 나섰다.
“전문성-외국어-도전정신 세가지 갖추면 자격 충분 힘든 만큼 자부심도 크죠”
세계은행(WB) 산하 국제금융공사(IFC) 중국·몽골 담당 매니저인 조 씨는 이날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12년간 국제금융기구에서 겪었던 경험을 젊은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어 정부 제안에 선뜻 응했다”고 말했다. ‘무한궤도’ 얘기를 꺼내자 그는 “아이 뭐 그런 걸…” 하며 손사래를 쳤다.
연세대 토목공학과 87학번인 그는 대학가요제 이후 1990년 정석원, 장호일과 함께 015B를 결성하고 1집 앨범에 참여했다. 동료들은 구름처럼 팬을 몰고 다니며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조 씨는 홀연히 밴드를 떠났다. 쌍용건설에서 2년간 일하다 유학을 떠나 미 스탠퍼드대, 일본 도쿄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다. 도쿄대에서 만난 아시아개발은행(ADB) 출신 지도교수의 권유로 영 프로페셔널 프로그램(YPP·박사인력 채용 프로그램)로 1999년 IFC에 들어갔다.
IFC는 민간기업 자본을 끌어와 민간 분야 개발을 진행하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기구다.
“공대 출신인 저에게 국제개발이라는 분야는 매우 흥미로웠어요. 전공을 살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을 다니며 개발 업무에 참여했죠. 개발도상국 경제에 작지만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조 씨는 2007∼2009년 미국 워싱턴의 IFC 본사에서 라르스 투넬 IFC 최고경영자(CEO)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했고, 2009년부터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신장(新疆)지구 개발 및 탄소감축 프로젝트 등을 맡고 있다.
국제기구 근무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조 씨는 “전문분야 지식과 외국어가 필수”라고 주문했다. IFC에는 인프라 건설, 교육, 헬스, 인권 등 다방면의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 남들보다 뛰어난 전문성이 있다면 국제기구 문호는 생각보다 활짝 열려 있다”고 했다. 10만 달러 이상의 고액 연봉을 받지만, 거칠고 험한 곳에서도 기꺼이 일할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보람과 긍지, 자부심이 그 어느 곳보다 큰 곳이 바로 국제기구입니다. 국제기구 취업을 원하는 한국의 젊은 후배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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