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2008년 9월 정부는 2009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로 내놓았다가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비판이었다. 다음 달 내놓은 2009년 예산안에서 성장률 전망치를 3.8∼4.2%로 하향 수정했지만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부가 이듬해 경제를 진심으로 낙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의 한 핵심 과장은 비보도를 전제로 “내부적으로는 내년 성장률을 마이너스로 잡고 있다”며 말 못하는 고민을 하소연했다. 강만수 당시 장관의 본심은 이듬해 강연에서 확인된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한국 경제의 회복세가 뚜렷하던 2009년 10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 강연에서 “세계 경제는 최소 2년간 현재의 불황이 이어질 것이다. 출구전략을 쓰든 안 쓰든 더블딥(경기회복 후 다시 침체)이 닥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2008년 낙관적인 전망치를 밀어붙인 배경은 뭘까. 당시 국내 민간 경제연구소가 발표하는 성장률 전망치에도 은근한 압력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부는 ‘시장의 심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한다. 비관적인 전망이 팽배하면 위기심리만으로도 위기가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강 전 장관은 경영학과 경제학에 비유하기도 했다. 경제학이 현실을 진단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경영학은 달성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해 나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정부는 경영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정부와 시장심리 간의 ‘전투’는 지금도 전방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추석 전 물가상승률이 치솟을 때 정부는 세무서 직원이 설렁탕집 가격표를 단속했던 1970년대식 해법을 동원했다. “욕을 먹는 것은 알지만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인플레이션을 부르는 악순환을 차단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정부 당국자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환율시장 개입도 마찬가지다. 투기 수요가 외환시장 움직임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환율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시장심리를 제압하지 않으면 곧바로 외환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게 정부 주장이다.
시장심리와의 전투에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부의 판정승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정부는 전선 뒤 국민들은 극도로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대란, 2008년 금융위기 등 숱한 위기를 극복해 왔지만 양극화의 골은 깊어졌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이번에도 정부는 일단 살아남고 보자며 ‘인내’를 당부하고 있지만, 전투 후 세상에 대한 논의는 막연하고 모호할 뿐이다. 관가의 모든 관심은 연말 인사와 내년 대선 판도에 쏠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국민의 심리를 치유하지 못하면 시장심리와의 전투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부와 정치권이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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