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사들 주부자문단 운영하며 아파트 품평받아가구형태·본보기집 평가·타사비교 등 다양한 조언들어
GS건설의 주부 자문단 ‘자이엘’ 이 이달 초 서울 강남구 청담동 청담자이 아파트 샘플하우스를 점검하고 있다.
《“아이 책상은 한번 사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써야 하는데 자녀방 가구는 초등학교 저학년용이에요. ” “맞아요. 더불어 책상 폭도 좀 키워야 햐요. 요즘 애들 책상위엔 컴퓨터랑 영어 학습기랑 함께 둬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글쎄, 저는 오히려 책상에 아무것도 두지 않도록 하거든요. 취향이 다른 걸 보면 결국 선택의 폭을 늘려야겠어요.”
이달 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청담자이 아파트. 30대 후반부터 40대로 구성된 아줌마 8명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따. 이날의 주제는 이 아파트에 설치된 옵션 가구. 자녀방 책상의 기능과 모양새를 논하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다고 동네 아파트 주부들의 수다 모임을 떠올렸다면 오산이다. 기업이 대외 홍보 목적으로 운영하는 ‘일회성’ 행사도 아니다. 이들은 ‘자이엘(XIEL)’ 이라 불리는 GS건설의 주부 자문단. GS건설에서는 2005년 부터 고객의 목소리를 듣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주부 자문단을 운영하고 있다. 》
‘자이엘’이 아파트 옵션가구를 주제로 토론(사진 위)과 발표(아래)를 했다. ‘자이엘’은 이같은 만남을 매달 두 차례 가진다. 사진=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매년 여덟 명씩 선발되는 주부 자문단은 분양 아파트 품평, 아파트 신상품 개발 조언과 아이디어 제안, 타사 상품과의 비교 분석, 본보기집 평가 등을 한다. 주부들은 한 달에 한두 번씩 GS건설뿐 아니라 타사 본보기집을 방문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건설사가 요청한 특정 주제를 조사해 설명회도 연다. ‘자이엘’ 회원인 주부 조영애 씨는 “공식적인 회의 외에도 과제와 발표를 준비하다 보면 그 외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적지 않다”면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과제를 준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건설사 움직이는 주부 자문단 파워
주부 자문단은 건설사의 아파트 상품 개발과 마케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달 두 차례 열리는 GS건설 주부 자문단 회의에는 인테리어팀, 상품개발팀 등 관련 부서 실무진은 물론이고 간부급도 참여한다. 5일 회의에는 원종일 GS건설 주택기술 상무가 참석해 주부 자문단의 말을 경청했다. 류정연 GS건설 인테리어팀 과장은 “실무진에서 논의하다 통과되지 못한 아이디어도 주부 자문단이 힘을 실어주면 통과될 때가 있다”면서 “직원들이 여러 번 얘기하는 것 보다 자문단의 제안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귀띔했다.
GS건설뿐 아니라 현대건설(‘힐스테이트 스타일러’) 대우건설(‘푸르지오 리더스클럽’) SK건설(‘행복 크리에이터’) 포스코건설(‘더 샤피스트’) 동부건설(‘명가연’) 등 많은 건설사가 2000년대 중반부터 이 같은 주부 자문단을 운영하고 있다.
주부 자문단 운영 초기에는 자문단이 이용 후기를 들려주거나 건설사의 설문에 답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최근에는 주부 자문단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건설사들은 본보기집 개장 전이나 새로운 상품을 내놓기 전에 주부 자문단의 검증을 받는다. 김민구 대우건설 주택기술팀 과장은 “관련 부서 품평회를 마친 후 주택본부장 검토 직전에 주부 자문단의 검토를 받는다. 지적 사항은 바로 수정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또 주부 자문단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실제 분양 상품에 반영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류정연 과장은 “주부들은 수납이나 주방 동선, 문을 여닫는 방향 등 실무자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의 불편함을 잡아내고 실생활 속 지혜가 담긴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경쟁사 아파트 거주자 우대…건축·디자인 전공자, 해외 유학파 출신도 다수
건설사들은 보통 서류전형과 면접 등을 통해 주부 자문단을 선발한다. 과거에는 자사 아파트에 사는 주부를 대상으로 자문단을 선발했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자사 아파트 거주자는 일부러 배제하는 추세다. 또 20대 초보 주부보다는 자녀를 키우는 30, 40대 경력 주부가, 낡은 아파트보다는 입주 5년차 이하 새 아파트에 사는 주부가 자문단으로 주로 선발된다. 한 대형 건설사의 주부 자문단 운영자는 “최신 주거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경쟁사의 새 아파트에 사는 주부를 선호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주부 자문단의 영향력이 커진 것과 비례해 자문단의 ‘요구 스펙’도 높아졌다. 분야도 주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축학이나 인테리어 디자인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하다. 박정영 현대건설 건축사업본부 대리는 “건축이나 조경, 디자인 전공자 이외에도 해외 MBA 출신이나 외국에 살다 온 경험이 있는 분도 많다”면서 “주부의 시각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도 있다 보니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다”고 귀띔했다. 주부 자문단으로 선발되면 건설사에서는 소정의 활동비를 지급한다. 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월 30만∼70만 원 선.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거문화를 바꾼다”는 보람이다. ‘푸르지오 리더스클럽’ 회원인 주부 최민경 씨는 “회원들이 활동비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 “건설사의 아파트 상품은 주부 자문단의 의견이 많이 반영돼 성취감이 크다”고 설명했다.
마케팅 전문가인 김민주 리드앤리더스 컨설팅 대표는 “아파트 상품 구매에서 주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면서 “최근 마케팅에서 제품 개발, 유통 과정에 이르기까지 직접 참여하는 ‘생산적 소비자’, 이른바 ‘프로슈머(prosumer)’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건설사들도 주부 자문단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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