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야심 차게 마련한 ‘나들가게 프로젝트’의 핵심사업이 지연되면서 ‘간판 교체사업’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나들가게에서 판매하는 물품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통합물류센터 건립이 지연되면서 기존 구멍가게와 달라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들가게는 정부가 기존 구멍가게를 대기업슈퍼마켓(SSM)과 경쟁할 수 있는 대항마로 키우겠다며 내세운 브랜드이다. 정부는 골목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간판 교체 및 판매시점관리기기(POS) 무상 지원 △리모델링 등 시설 개선자금 대출 지원 △경영개선 상담 등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대책의 핵심인 통합물류센터 건립이 예산 확보의 벽에 부닥치면서 제 기능을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 기획재정부, 물류센터 건립 “경제성 낮아”
2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중소기업청의 5개 물류센터 건립사업(600억 원)은 지난달 재정부의 예비 타당성 조사에서 ‘타당성 없음’ 결과를 받아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 났다. 재정부 관계자는 “경쟁이 치열한 민간부문에 정부 유통회사를 만들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비용 대비 편익을 따진 경제성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물류센터 건립은 당장은 추진이 어렵게 됐다.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사회 및 경제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불가피한 사업을 제외하고는 통상적으로 예산 확보가 안 되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예산을 반영할 수는 있다.
이에 앞서 중소기업청은 지난해 5월 200개 개점을 시작으로 나들가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전국 20여 곳에 물류센터를 지어 공동구매를 추진하고, 소비자가격을 낮춰 나들가게의 가격경쟁력을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5300여 개인 점포는 내년까지 1만 개로 늘릴 계획이다. 올해 215억 원이던 나들가게 육성지원 예산도 내년에 334억 원으로 증액됐으며 추가로 금융지원 4300억 원, 소상공인 경쟁력 제고 415억 원 등 총 7536억 원이 소상공인과 전통시장 자생력 확보를 위한 예산으로 편성됐다.
○ 사업 표류에 ‘뿔난’ 나들가게 주인들
물류센터 건립계획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면서 나들가게 주인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서울 동작구의 한 나들가게 주인 김모 씨(49·여)는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있어야 나들가게를 찾아올 것 아니냐”며 “가격경쟁력의 기반이 되는 물류센터가 없으면 나들가게 프로젝트는 공염불이며 SSM과의 일전은 이미 진 싸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나들가게 주인 정모 씨(51·여)도 “정부가 POS를 공짜로 설치해주고 진열대 청소를 도와줬지만 매출은 전과 달라진 게 없다”며 “경영기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물건 배치 같은 것은 우리가 더 잘한다”고 했다. 그는 8년 전부터 가게를 운영하고 있지만 주변에 대형마트와 SSM이 늘면서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보다 하루 매출이 30%가량 줄었다. 정 씨는 “대형마트를 규제하지 않으면 4, 5년이면 구멍가게가 다 망한다”고 하소연했다. 경기지역의 한 나들가게 주인 A 씨(50)는 “아직도 간판에 걸린 이름을 보고 나들가게가 무엇이냐고 묻는 손님이 많다”고 전했다.
사업을 맡고 있는 중소기업청도 난감해졌다. 경제성 분석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사업을 추진했다는 따가운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가격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공동구매가 아닌 소프트웨어적인 경영지원으로도 가능하다”며 “나들가게로 변신한 뒤 매출이 올라간 우수 점포 사례가 많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들가게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선 물류센터 건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박주영 숭실대 교수(벤처중소기업학)는 “나들가게 업주들의 협상력을 강화하고, 매대의 상품 구성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물류센터는 반드시 필요하다”라며 “물류센터가 없다는 것은 손발을 묶고 SSM과 경쟁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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