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세워지는 68층 높이의 ‘동북아트레이드타워’와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123층짜리 ‘롯데수퍼타워’,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에서 착공을 앞둔 108층 ‘WBC 솔로몬타워’엔 공통점이 있다. 5년 내에 300m를 넘는 한국의 대표적 초고층빌딩으로 완공된다는 것, 그리고 외국의 유명 건축설계회사가 설계를 도맡았다는 점이다.
부동산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주춤했던 ‘마천루 프로젝트’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초고층 건축기술의 꽃으로 불리는 설계 분야는 외국 기업의 독무대다. 특히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으로 꼽히는 용산 국제업무지구는 한국 건축가가 한 명도 끼지 못한 채 해외 건축설계회사들이 핵심설계를 독차지했다.
세계에서 150층 이상 초고층빌딩을 시공한 경험이 있는 나라는 한국건설사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초고층 시공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초고층 설계시장에선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뒤처져 있다.
설계공모 과정에서부터 국내업체를 배제한 채 외국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자 ‘설계기술 사대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본기는 있지만 경험이 부족한 국내업체에 실적을 쌓을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 설계는 모조리 외국인
총사업비 31조 원에 설계비만 3269억 원에 이르는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은 미국과 유럽, 일본 건축설계회사 19곳이 총괄기획부터 각 구역별 건축물 설계를 맡고 있다. 9·11테러로 쓰러진 미국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재건축 설계를 맡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총괄기획자로 나섰으며,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이탈리아 출신의 렌초 피아노, 세계 최고층빌딩 부르즈칼리파를 설계한 미국 건축가 에이드리언 스미스, 독일 베를린 소니센터를 설계한 헬무트 얀 등이 대거 참여한다. ▼ 국내업체 쏙 빼고 외국회사만 콕 찍어 “입찰하라” ▼
100층짜리 랜드마크타워, 초고층 호텔 주상복합 오피스 건물을 비롯해 지하에 서울 강남 코엑스몰의 6배(40만 m²) 규모로 개발하는 상업시설이 이들의 손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국내 설계업체로는 삼우, 시아플랜, 해안, 무영 등이 참여하는데 이 업체들은 기획, 계획설계 과정에선 배제된 채 외국 설계사로부터 하청받는 형태로 참여하거나 시방서(공사 순서를 적은 문서)를 만드는 실시설계 단계만 담당한다. A건축설계사 관계자는 “외국 건축가가 건물 콘셉트와 기본을 설계하면 한국 업체는 ‘로컬 파트너’라는 이름만 달고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공공 발주부터 국내업체 기회 줘야”
국내 초고층 설계시장이 ‘외국인 잔치’가 된 데는 기술력의 차이도 있지만 ‘기술 사대주의’가 더 큰 원인이다. 건축설계업계 관계자는 “해외 유명회사는 국내업체보다 통상 설계비용을 2배 정도 더 요구하는데 굳이 해외업체를 찾는 것은 해외명품 지상주의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김상대 고려대 건축사회환경공학과 교수(세계초고층학회 학회장)는 “국내 업체가 선진국보다 기술력이 10% 정도 떨어지는데 이는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며 “기술 사대주의 때문에 한국 업체에 참여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경험이 없다 보니 기술력이 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건축주나 시행사들은 초고층 건물의 설계업체를 뽑을 때 문호가 열려 있는 ‘경쟁 공모’ 방식보다 유명 건축가나 회사를 지명해 기회를 주는 ‘지명 공모’ 방식을 많이 쓰고 있다. 용산 국제업무지구도 해외 설계업체 24곳에만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보내는 지명 공모 방식을 택했다. 국내 A건설사 관계자는 “해외 스타 건축가의 이름이 들어가면 분양이나 임대할 때, 혹은 자본을 유치할 때 마케팅 효과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풍토에서 국내업체는 영원히 하청업체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성우 한양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초고층빌딩 설계라도 국내업체에 맡기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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