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1조달러 시대 성장 코리아의 신화]<7>나는 이렇게 뛰었다 (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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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8일 03시 00분


도전…조선소 지으며 유조선 만들던 열정 이어 동남아 흙탕물로 목 축이며 계약 따내

● 조충휘 前현대중공업 사장

‘한국에 대형 조선소를 만든다는 건 허황된 꿈이다. 현대그룹이 요청한 대출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1971년 산업은행에 갓 들어온 28세의 신입 행원 조충휘는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와 모래사장만 찍힌 조선소 예정 용지 사진만 들고 선박을 수주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때다. 서울대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고 산은 기술부에서 사업성 검토를 담당하던 그로선 현대그룹의 도전이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공장은커녕 제대로 된 생산설비조차 없던 ‘무(無)’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정확히 28년 뒤 ‘한국에서 대형 조선소는 꿈’이라고 했던 이 청년은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 사장 자리에 올랐다. 27일 동아일보와 만난 조 전 사장은 “조선공학을 전공한 나 자신도 우리나라가 조선산업에서 세계 정상에 서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며 “나와 현대의 인연은 이렇게 묘하게 시작됐다”고 전했다.

○ 화장실 물 마시며 현장으로


조충휘 전 현대중공업 사장(왼쪽)이 1997년 1월 선주인 미국 OSG사 관계자들과 선박 토스카니니의 명명식을 갖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현대중공업 제공
조충휘 전 현대중공업 사장(왼쪽)이 1997년 1월 선주인 미국 OSG사 관계자들과 선박 토스카니니의 명명식을 갖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현대중공업 제공
조 전 사장의 현대에 대한 의구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4년 산은 직원으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를 둘러보면서 그의 의심은 찬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배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던 현대가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26만 t급 대형 유조선(VLCC) 두 척을 건조해 내는 대역사를 이룬 것이다. 조선소 독을 세우면서 동시에 배를 건조해낸 것은 세계 조선산업 역사상 처음이었다.

특히 그는 선체를 들어올리는 ‘골리앗 크레인’을 부품째 들여와 직접 조립할 것을 고집한 현대의 장인정신에 놀랐다. 완제품을 쉽게 선박으로 들여올 수도 있었지만 현대는 ‘언젠가 국산화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직원들이 일일이 손수 조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크레인 구조를 직접 들여다보겠다는 엔지니어들의 열정에 크게 놀랐다. 이런 곳이라면 청춘을 한번 걸어봄 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안정된 은행원 생활을 버리고 1976년 현대중공업으로 자리를 옮긴 조 전 사장은 세계를 무대로 본격적으로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첫 무대는 1980년 방글라데시 제1 항구도시인 치타공이었다. 당시로선 큰 규모인 1000만 달러 변전소 입찰을 따내기 위해 사무실이 있던 다카에서 현장까지 12시간을 열차로 달렸다.

치타공으로 가는 첫 열차 여행에서 그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40도가 넘는 여름에 물을 구할 길이 없었다. 현지인들이 어디선가 물을 떠오기에 따라가 보니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흙탕물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으면 탈수증에 걸릴 처지였기에 수건에 더러운 물을 묻혀 입을 적시면서 버텨냈다.

○ 치열했던 정보전


해외영업은 정보기관원 업무에 곧잘 비유된다. 낯선 외국 땅에서 프로젝트를 따내려면 사람과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인도 뭄바이에서 근무하던 1983년 국영기업 S사로부터 6만2000t급 유조선 11척을 수주할 때에도 그랬다. S사를 수시로 드나들 때면 언제나 회사 입구에 놓인 방명록을 세심하게 들춰봤다. 경쟁사에서 어떤 직급의 임직원이 언제 누굴 방문했는지를 재빨리 파악해야 알맞은 대응을 할 수 있어서다.

1989년 컨테이너 강국인 독일로부터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1800TEU급 컨테이너선 네 척을 한꺼번에 수주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전의 승리였다. 현대중공업과 입찰에서 경합한 곳은 컨테이너선 설계기술에서 한국을 앞서 있던 일본 조선업체. 당시 일본 조선사는 컨테이너선의 적재용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형 설계기술과 선박 재질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일본 조선업계를 잘 알면서 동시에 발주업체의 속내까지 파악하고 있던 컨테이너선 전문 브로커를 용케 찾아냈다.

“떠오르는 한국 조선업체를 잡지 못하면 앞으로 큰 성공을 거두시기 어려울 겁니다.” 조 전 사장은 독일인 브로커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당당하게 말했다. 조 전 사장이 본사 엔지니어들을 독일로 불러들여 현대중공업의 기술적 저력을 보여주자 그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여기에 심장병을 앓던 브로커의 부친을 위해 만날 때마다 약을 챙기는 세심한 배려도 한몫했다. 결국 현대중공업은 이 브로커를 통해 경쟁사가 어떤 사양과 가격으로 입찰에 참여했는지 미리 파악해 수주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조 전 사장은 “열정과 도전정신 하나로 조그마한 어촌을 세계 조선산업의 중심으로 탈바꿈시킨 정 명예회장과 수많은 동료의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조충휘 前현대중공업 사장 ::


1943년 출생
1970년 서울대 조선공학과 졸업
1970∼74년 한국산업은행 근무
1976년 현대중공업 입사
1983년 인도 뭄바이지점 근무
1986∼90년 런던지사장 이사 및 상무로 일하면서 독일에서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컨테이너선 수주에 성공
1998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1999∼2001년 대표이사 사장
▼개척… 길 없는 곳에 길 내는 것이 바로 상사맨, 산길 막혔을 땐 물길 열어 철근 날라▼

● 주진효 LG상사 상무


30개국에 철강 수출에 나섰던 주진효 LG상사 상무(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3년 터키 협상 뒤 바이어들과 함께 있는 모습.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LG상사 제공
30개국에 철강 수출에 나섰던 주진효 LG상사 상무(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3년 터키 협상 뒤 바이어들과 함께 있는 모습.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LG상사 제공
“우리가 제대로 교역을 하려면 사나이답게 술을 한 잔해야 하지 않갔소?”

1991년, 당시 말단 대리였던 주진효 LG상사 상무는 ‘North Korea(북한)’팀에 배치됐다. 한국 철강제품과 생필품을 북한에 주는 대신 북한에서 아연과 석탄을 가져오는 물물교환 방식의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을 비즈니스 상대로 만난다니 막막했다.

중국 베이징의 한 음식점에서 북한 무역회사 사장을 만났다. 그들의 사업 방식은 거칠었다. 북한 기업인은 보란 듯이 맥주잔보다 1.5배 큰 잔에 52도짜리 고량주를 가득 채우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 상무에게도 잔을 내밀었다. 똑같이 한 잔을 들이켰다. 석 잔씩을 대결하듯 마셨다.

처음에는 공격적이던 그들도 점차 호의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용 비닐부터 철강까지 점차 주고받는 품목을 늘렸다. 1993년에는 LG상사와 북한 무역회사들 사이의 교역 규모가 1억 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주 상무는 “북한은 여태까지 겪어본 것 중 가장 힘든 비즈니스 상대였다”면서 “상사맨에게는 국경도, 한계도 없다는 것을 배운 계기”였다고 말했다.

○ 외환위기와 플래카드


‘주진효 차장님의 한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1998년, LG상사 홍콩지사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던 주 상무가 홍콩 바이어와 국내의 한 철강공장을 방문한 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차에서 내린 주 상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장 입구에 주 상무를 환영하는 큰 플래카드가 펄럭였고, 바닥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데, 회장이 직접 나와 “주 차장님이 아니었으면 부도가 날 뻔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이 회사와 오래 거래해 왔지만 과장이나 부장이 아닌, 회장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회장은 아끼던 고급 양주를 주 상무에게 선물했다. 주 상무 일행을 정성껏 대접하기 위해 멋진 도자기에 차를 내오는 그들을 보는데 기분이 뭉클했다.

한 해 전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 힘들어지겠는데….” 주 상무는 홍콩에서 한국 내 소식을 다룬 신문기사와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국내 유수의 철강 기업들이 도산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재고는 쌓이고 이자는 늘어나고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철강기업 직원들의 하소연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주 상무는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남, 터키, 이란 5개국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간 ‘한국산 제품을 쓰고는 싶은데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현지 바이어들이 거래를 머뭇거렸던 곳이었다. 주 상무는 바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매주 한 곳씩 출장을 가 살다시피 했다. “제품이 이렇게 좋은데 지금 환율 효과 탓에 가격경쟁력이 높아졌다”며 바이어들을 설득한 끝에 철강재 20만 t을 중국과 대만 등에 수출해 1억200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려줬다. 그는 “상사맨으로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수출일선에 서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큰일 났어요. 재료가 없어서 건물을 올릴 수가 없어요.”

2007년 국내 한 건설업체가 캄보디아에 대형 빌딩을 짓기 위해 프로젝트에 착수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건물의 뼈대가 될 ‘철근’을 확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은 이랬다. 공사현장인 프놈펜까지 철근을 가져오려면 항구가 있는 시아누크빌에서 산을 따라 5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산길 곳곳에 총으로 무장한 강도들이 잠복해 있었다. ‘어느 기업은 물건을 몽땅 약탈당했다더라’,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수십 명이 죽고 다쳤다더라’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다. 철강을 운반하려면 트럭 수백 대가 이동해야 하니 조용히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조 상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했다. 남이 가던 길만 따라 걷는 것은 상사맨이 아니었다. 호찌민에서 프놈펜까지는 메콩 강이 흐른다는 점에 착안했다. 산과 달리 물길은 강도들로부터 안전지대였다.

그는 얕은 바지선에 물건을 실어 강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프놈펜 옆에는 배를 댈 만한 부두가 없었던 것. 하지만 이것 역시 ‘없다면 만들면 될 일’이었다. 부두까지 뚝딱 만들어 1만1000t, 1200만 달러 규모의 두꺼운 철근을 안전하게 수송했다. 단순히 철근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우리나라 기업이 공사를 제대로 마무리 짓도록 돕고 싶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건설업체 담당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 상무는 “다른 어느 나라 기업도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못했다. 수출 현장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온 한국 기업들은 그런 발상의 전환이 몸에 내재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 주진효 LG상사 상무 ::


1960년 출생
1987년 부산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7년 고려무역 입사
1989년 럭키금성상사 입사
1991년 NK(North Korea·북한 사업)팀
2000년 홍콩지사 철강팀장
2007년 철강팀장
2008년 철강수출 공로를 인정받아 제45회 무역의 날 지식경제부장관상 수상
2010년 철강1사업부장·임원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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