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풍파랑(乘風破浪·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친다).” 권오철 하이닉스 사장(사진)은 2012년 새해 소망을 묻자 대뜸 종이를 꺼내 이와 같은 한자를 적었다. 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하이닉스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권 사장은 “많이 인용되는 말이지만 요즘 이 고사성어가 계속 떠올랐다”며 “옛날에는 바람도 없이 우리끼리 노를 저어가며 온갖 역경을 견뎌냈지만 새해부터는 뒤에서 불어주는 큰 바람을 타고 어지간한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권 사장이 말하는 ‘큰 바람’은 SK텔레콤이다. 하이닉스 채권단은 지난달 SK텔레콤과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2001년 10월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간 이후 10년 만에 ‘새 주인’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새 주인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두 번이나 불발됐다. 올해 세 번째 시도 끝에 ‘주인 찾기’에 성공했다.
1984년 현대그룹 입사 후 줄곧 하이닉스 역사와 함께 해온 권 사장은 대주주 없던 지난 10년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가 언제 누구한테 팔려갈지도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경영계획도 이왕이면 보수적이고, 위험을 피하려는 방향이 됐다”며 “반도체 산업은 불황일 때도 투자해 호황일 때 돈을 벌어야 한다. 한번 투자했다 하면 3조∼4조 원인데 든든한 후원자가 없으니 아쉬운 투자가 많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아쉬운’ 투자는 전원을 꺼도 정보를 저장할 수 있어 모바일 기기에 많이 쓰이는 낸드플래시 시장이다. 아이폰과 스마트폰, 태블릿PC의 인기로 낸드 시장은 급성장세다. 권 사장은 “한때 낸드 시장에서 19%까지 시장점유율이 올라갔지만 투자 여력이 없어 지금은 약 10%에 불과하다”며 “2007∼2008년에 채산성 없던 8인치 낸드 시설을 뺀 뒤 12인치로의 전환이 늦었다. 남들처럼 투자를 확대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점은 직원들의 사기였다. 권 사장은 “한때 직원들이 ‘하이닉스’ 다닌다고 하면 시집 장가갈 때 안 좋은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 회사가 잘 운영되더라도 매물로 나와 있다는 느낌 때문에 직원들이 자부심에 상처받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권 사장은 올해 ‘오래가고 좋은 회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10년 만에 첫 TV광고를 냈다. 그는 “광고비도 아껴서 기술 투자를 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광고를 낸 것”이라며 “요즘은 세계 메모리반도체 2위 업체 위상에 걸맞게 직원들이 ‘시집 장가갈 때 도움이 된다’고 한다”며 웃었다.
지난 10년 동안 반도체 산업에는 세 번의 커다란 파도가 있었다. 2001년 닷컴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11년 경기침체와 PC산업의 위기 등 정보기술(IT) 패러다임의 변화다. 올해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반도체D램 값은 폭락했고, 한치 앞도 모를 거시경제의 불안요소도 많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내년에 더 큰 희망을 안고 있다. 권 사장은 “SK라는 거대한 회사의 ‘가족’이 됐다는 게 앞으로 인재와 자금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우리 고객들(휴대전화 제조사)이 결국 SKT에 납품을 하는 구조라 향후 모바일 기기에 하이닉스 제품이 탑재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내년에는 낸드와 모바일 기기용 D램 투자도 늘릴 예정이다. 약 4조 원을 투자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 사장은 “SKT의 인수로 모바일 IT 생태계에 하이닉스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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