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업체에 다니는 최상욱 씨(40)는 9월 초부터 연금저축 상품을 알아봤다. 노후 대비뿐 아니라 연말정산 때 최대 400만 원까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재테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연금저축 가입을 포기했다. 지난달부터 대출원금 분할상환이 시작되면서 여유자금이 아예 없어져서다.
가계부채가 늘면서 저축을 포기하는 가계가 늘고 있다. 과거에는 경제가 힘들수록 미래에 대비하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엔 빚 갚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저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 싸늘하게 식은 연말 저축 열기
28일 금융계에 따르면 23일 기준 국민, 신한, 우리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총 295조4240억 원으로 지난달 말보다 2조4345억 원 감소했다. 은행들이 추가 금리를 얹어주는 조건으로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지만 신규 가입이 예년만큼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만기 후 재예치하는 고객도 별로 없다. 유럽 재정위기가 심해지면서 고객들이 안정적으로 돈을 맡길 수 있는 예금에 몰릴 것으로 은행들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우리은행에 1년간 예치해둔 3000만 원짜리 정기예금을 10월 말 찾은 김모 씨(42·자영업)는 이 돈을 잠깐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뒀다가 이달 초 대출금을 갚는 데 썼다. 김 씨는 “빚부터 갚아야지, 재테크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소득공제 혜택을 주는 연금저축도 올해는 연말에 가입 잔액이 줄어드는 의외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 신한, 우리은행의 연금저축 잔액은 11월 말까지만 해도 총 9조7338억 원으로 금세 10조 원을 넘어설 듯했지만 23일 기준 잔액은 9조6808억 원으로 전달보다 530억 원 줄었다. 신규 가입은 늘지 않고 급전이 필요한 일부 가입자들이 그동안 세제혜택으로 얻은 금액을 물어내면서까지 해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마포구의 한 시중은행 영업점 직원은 “연금저축 상품별 장단점을 꼼꼼히 물어보기만 하고 가입은 뒤로 미루는 고객이 부쩍 늘었다”며 “바로 개설 신청서를 쓰는 고객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 쥐어짜도 안 되는 한계상황
과거 경제위기 때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있었다.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5.1%였던 저축률은 이듬해인 1998년에 21.6%로 뛰었고, 카드사태가 일어난 다음 해인 2004년의 저축률은 8.4%로 2003년보다 3.6%포인트 높아졌다. 2009년의 저축률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에 비해 1.6배 수준으로 높았다.
그러나 최근 가계부채가 900조 원에 이르면서 대다수 가계는 ‘아무리 쥐어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바짝 마른 수건’ 같은 상황에 몰렸다. 금융감독원이 통계청과 함께 전국 1만 가구를 표본 조사한 결과 가구당 평균 부채는 지난해 4618만 원에서 올해 5205만 원으로 12.7% 늘었다. 소득에 비해 지출이 많은 적자가구의 비율은 3분기 기준 28.2%로 2분기보다 2%포인트 증가했다. 결국 소득 증가세 둔화, 부채 급증, 국민연금이나 사회보험 같은 부담금 증가 등의 요인이 맞물려 저축을 포기하는 가구가 늘어난 것이다.
2010년 기준 한국의 저축률은 4.3%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처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4%)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 계속되면 투자재원이 고갈돼 성장잠재력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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